9년 전, 10월 31일
written by. 아메트린
하기와라 켄지는 평상시와 같은 잘생긴 마스크에, 조금은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감을 부어 칠한 듯한 회색 섞인 하늘색, 창밖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옷차림도 각양각색이다. 동화책에서 질리도록 나오는 고깔모자와 별이 박힌 망토를 두른 마법사, 뾰족한 귀와 송곳니가 돋보이는 드라큘라, 눈 언저리에 얼기설기 기운 듯한 바느질 자국을 그려놓은 좀비. 아이들도 호박 탈을 쓴 채 손에 사탕과 초콜릿, 젤리들이 담긴 봉지를 들고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기 바쁘다. 그래. 할로윈, 할로윈이다. 대개 분장과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것에 열을 올리는 오컬트 마니아, 사축 생활에 찌든 뇌에 환기를 쐬고 있을 직장인, 간식거리 복이 터지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아이 등등이 환영할 법한, 그런 날이다. 아마 여기에 높은 확률로 잉꼬 부부 같은 연인도 있을 것이다-크리스마스가 대세지만, 어지간한 기념일은 연인들의 염장 지르는 날이라는 것을 그는 몹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퇴근을 못 하고 있는 거냐고요…….”
“하기와라, 땡땡이 치지 말고 주문 받아! 어차피 오늘 강의 없어서 할 일도 없다며!”
“하지만 이따 누나랑 친구랑 저녁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요…….”
“‘이따가 저녁’이잖아? 기각. 오오사카가 올 때까지만 참아. 원망하려면 오오사카가 탄 전차를 원망하고. 시급은 쳐줄 테니까. 잘 지키고 있어.”
“그건 당연한 거 아닌……, 아니에요, 하아아…….”
점장이 가볍게 손날을 뒤통수에 먹이며 지적했지만, 하기와라의 키가 훨씬 컸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미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어쨌든 그 응징 한 번으로 자신의 의무를 마친 점장이 핸드백을 왼어깨에 메고 급하게 나갔다. 그러고보니 점장님, 오늘이 결혼 기념일이라고 했던가?
일하기 싫다 징징거려도 메뉴판을 보며 어떤 음료와 케이크를 주문할지 고르는 손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남은 아이스크림 그릇을 거품 한 점 남기지 않고 깨끗이 씻어 식기건조대에 엎어놓고 나오며 하기와라는 카운터의 줄을 확인했다. 그가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는 베이커리 겸 카페였는데, 평소 식사까지 하고 가는 손님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기에 가게에서 일하는 알바생도 하기와라와 오후반의 오오사카 두 사람 뿐이다. 당연히, 평소의 이야기일 뿐이다. 할로윈으로 모두가 사고회로에 한 줌 정도 헬륨 가스를 넣고 다니는 날, 카페 따위의 불규칙한 손님 리듬을 타는 업종이 필요 최소한의 인적 자원을 고수하면 어떤 꼴이 나는지를 절감하며 하기와라는 양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웃는 마스크를 만들어보인다. 지금이야 한참 찡얼거리고 난 직후지만, 일하다 꽤 귀여운 여자아이들이 손님으로 오면 언제 퇴근 노래를 불러댔는지 잊을 정도로 스스로가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하기와라는 잘 알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뭘로 주문하시겠어요? 그렇게 상투적인 질문을 던진다. 관자놀이에 커다란 볼트 나사가 하나 박힌 남자라……, 프랑켄슈타인인가. 프랑켄슈타인이 턱을 짚고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단호박 타르트랑 카페라떼요. 누구보다도 빠른 남자 하기와라 켄지가 갓 구워진 단호박 타르트를 쟁반에서 꺼내러 달려 나가신다.
집중이란 건 좋은 것이다. 잔뜩 줄을 지어 늘어선 괴물들을 테이블로 안내하고 계산 몇 번 두드리는 일에 혼을 빼놓듯 하다, 마지막 손님인 예닐곱 살 배기 정도 되는 소녀가 쓴 뾰죽한 빨간 모자 끝부분이 문 너머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하기와라가 문득 시계를 보았을 때는, 작은 바늘이 벌써 4를 향해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오오사카 녀석은 전차를 스스로 만들어 오는 건지 감도 안 오지만-이 생각을 하다가 하기와라는 진페이라면 정말로 그럴 위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런 텐션이면 나중에 오오사카 녀석이 왔을 때마저 손님을 빌미로 가게에 붙잡히는 일은 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창가 쪽에서 잔물결처럼 이는 손님들의 소요가, 하기와라의 청각에 포착되었다.
하나같이 뭐야, 무슨 일이야? 하며, 연한 베이지색 커튼과 반투명한 가게 유리 사이의 틈으로 바깥을 바라보려 애쓴다. 방금 막 가게가 있는 상가에서 나온 사람들 또한 재미있는 구경거리라 생각을 한 모양인지, 하기와라가 살짝 커튼 너머로 엿보았을 때 보인 것은 모여서 저들끼리 수군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등이었다.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입장이니 섣불리 가게를 뜰 수도 없지만, 경찰이 왔다는 소리까지 문 너머에서 들려오자 역시 긴장감이 도는 일은 어쩔 수 없다. 뭐 해결이야 훨씬 수월하게 되겠지만.
목을 넘어서 얼굴까지 다 가려버리는 높은 칼라의 부직포 망토. 전형적인 드라큘라 분장을 한 남자와 투명한 날개 막을 등뒤에 붙인-하기와라는 어떻게 저런 날개의 구현이 가능할까 속으로 생각했다-여자 둘이 방금 막 비운 접시와 커피잔이 담긴 쟁반들 반납대에 올리고 카페를 나갔다. 보다 신속한 칼퇴근을 위해서 지금 해야할 일. 감사합니다! 그것을 깔끔히 씻어내기 위해 개수대가 설치된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며 하기와라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손님들이 먹고 간 크로크 무슈의 소스가 접시 바닥에 찐득하게 붙은 것을 떼어내며 하기와라는 생각했다. 사람이 다치거나 죽지 않았으면 좋겠네. 바깥의 웅성임이 사라지고 인간 벽이 저 갈 길을 찾아서 가는 걸 보면 어찌저찌 해결은 된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문 안쪽에 건 벚꽃 모양 벨 장식이 딸랑였다. 어서 오세요, 하며 인사를 건네던 하기와라의 마지막 말 끝에 기묘한 활력이 들어가 숨쉬었다. 와, 귀여운 여자애.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머리색은……, 천연 금발인 것 같다. 관광온 외국인이거나 혼혈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카운터로 머뭇머뭇 걸어오는 여성의 핸드백 끈 솔기가 조금 찢어져 있었다. 산 지 얼마 안 된 새 것 같은데?
“저기….”
“어서 오세요! 무슨 주문 하시겠어요?”
“그러니까, 음…….”
하기와라의 주문에 여성은 머뭇거리다가 출입문 쪽을 잠깐 쳐다보았다. 그러다 잠깐만요, 한마디를 남긴 후 출입문을 살짝 열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뭐 좋아하세요? 네? 어……, 전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진짭니다! 굵직한 남성 목소리가 들렸다. 목청이 적당한 볼륨으로 울리면서도 딕션이 좋다. 가게 밖에서 말을 하고 있는데도 하기와라의 귀에 다 들릴 정도였다. 출입문 유리 너머로 언뜻 훔쳐보면 키가 꽤 큰데, 학급 반장이라도 여러 번 해봤을 것 같은 느낌이다. 저 사람 남친인가? 하지만 남친이라면 보통은 뭘 좋아하는지 정도는 여친이 다 알지 않을까……. 하기와라 혼자서 알쏭달쏭해하고 있는 사이, 여성이 다가왔다.
“죄송해요. 그러니까……. 라떼로 주세요. 두 잔이요.”
“뜨겁게 해드릴까요, 아니면 차갑게?”
“아, 그건…….”
여성이 또 다시 가게 바깥쪽을 훑는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하기와라가 물었다.
“바깥에 일행분이 계세요?”
“아하하, 일행분은 아니지만요. 신세를 졌다고나 할까…….”
“헤에…, 저 남자분이 핸드백이라도 되찾아주셨으려나요?”
“어, 그걸 어떻게…!”
“아하하, 방금 건 그냥 적당히 끼워맞춰본 거예요. 아무래도 손님 핸드백의 솔기가 터진 걸 보면 무슨 일이 있기는 했었구나 싶어서요.”
“저도 막 날치기를 당했을 땐 꼼짝없이 못 찾는 줄 알았는데…. 굉장했어요. 사복경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잡아주셨다고 할까…….”
“와아, 정말요? 저도 그 쪽 일 생각 중인데.”
남자분도 같이 들어오셔서 잠시 쉬다 가셔도 좋지 않을까요? 자리는 치워드릴 수 있거든요. 은근슬쩍 제안하자 금발 여성은 금세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아아니, 괜찮아요! 그냥 핸드백을 되찾아주신 게 너무 고마워서 커피 한 잔이라도 사 드리려고…….”
“에이, 아쉬워라.”
“저기, 저는 안 사주셔도 괜찮으니까- 악!”
바깥에서 서성이던 그림자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다.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다. 그리고 커다랬다! 요즘 일본에도 키가 기이할만치 커다란 남성들이 자주 보이기는 하지만-하기와라처럼-, 남자는 하기와라보다도 반 뼘은 더 커다랬다. 가게 문이 살짝 낮은 편이라 하기와라도 간혹 가게의 짐을 나를 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긴 하지만, 남자는 그런 알바직 같은 것이 아니니 고개를 숙이는 일을 깜빡해 이마를 부딪히는 일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곧바로 빨갛게 부어오르는 남자의 굵직한 눈썹은 우직해보이고, ……어라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폼 안 나는 짓인 줄을 알면서도 하기와라는 제 뒷머리를 매만지며 잠깐 고민한다. 그리고 3초 가량 생각했다가 속으로 외친다. 몰라 기억 안 나!
“저기, 괜찮으세요?”
“아구구……, 괜찮습니다. 근데 진짜 전 괜찮은데……,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럴 리가요.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어서, 처음에 핸드백을 뺏겼을 때는 가슴이 내려앉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거든요. 날치기범이 달려가는 속도도 제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러니까 커피라도 받아주셨으면 해요. 맞아, 커피…, 따뜻한 거랑 차가운 거랑 뭐가 더 취향이세요?”
“네? 그러니까, 그건…, 저는 그 뭐야, 따뜻한 쪽이 좋습니…, 아니,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라떼 따뜻한 걸로 두 잔 테이크아웃 부탁드…, 어라, 왜 그러세요?”
“아앗, 하, 하하하…, 아무것도 아녜요! 라떼 따뜻한 걸로 두 잔 곧 만들어 드릴게요!”
하기와라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라떼를 준비하기 위해 스팀기로 거품을 만들 우유를 부으며, 두 남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왐마야……. 그는 적극적으로 연애 소설이나 드라마 따윌 챙겨보는 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의 절친이든 혈육이든, 그들 또한 연애 픽션과 그다지 인연이 없는 사람들 투성이였다. 그래도 저녁 식사를 하면서 TV채널을 돌리다가, 여성과 남성의 사이에 불가시적인 분홍빛 기류가 느껴지는 것 같으면 자신도 모르게 돌리던 채널을 멈추고 잠깐 보곤 했다. 그러다 치하야가 채널을 다시 돌리면 투정을 부리기도 했고 말이다. 아 누나! 한창 재미있는 부분인데! 요즘은 최악의 첫인상으로 시작했다가 엉망진창으로 감기는 게 유행이라곤 하지만, 과거의 클리셰가 유구하게 인기가 있는 데도 이유가 있는 법이다.
눈 앞에서 멜로 드라마의 첫 장면이 스쳐지나간-보통 이 쯤에서 화면이 멈추고 스폰서 배너가 우르르 뜬 다음 차회예고에 들어간다는 사실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듯한 느낌에 하기와라는 싱글싱글 웃으며 금세 뽀얀 거품이 몽글거리는 우유 표면을 내려다보았다. 드립한 커피를 넣고 우유를 붓다가, 그간 알바 일을 하며 실력이 많이 는 하트도 살짝 그려넣고 뚜껑을 덮었다. 라떼 두 잔 나왔습니다! 하기와라의 직감 상 왠지 가까운 시일 내 데이트 약속이 잡힐 것 같은 남녀 한 쌍은 한 명은 공손하게, 한 명은 멋쩍게 잔을 받아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보니,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실까요? 작은 입구로 라떼를 한 모금 머금은 여자의 물음에 남자가 머뭇머뭇 대답하다가 꼴사나운 비명을 지른다. 아, 저는 다… 크억! 윗공기 맑은 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닌 모양이다.
몰아친 손님들이 적당히 식사를 끝내고 빠져나갈 일만 남아서일까? 가게 일은 꽤 쉬엄쉬엄 돌아갔다. 하기와라는 손님들이 자리를 비운 곳을 치우고 설거지를 끝내고, 슬슬 남은 빵과 디저트를 포장해 진열해두기 위해 수납장에서 비닐을 꺼냈다. 본 적 없는 낡아빠진 우산이 하나 굴러나왔지만, 가끔 카페의 분실물을 보관해두기도 하는 수납장이니만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카페 주방 칸막이 바로 옆의 테이블을 닦던 하기와라가 문득 커튼 너머를 아리송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곧 11월이니 해가 짧아질만큼 짧아졌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짧아졌나. 왜 벌써 이렇게 어둑하지? 그 순간 가게 밖에서 희푸른 빛이 잠깐 반짝였다. 이어서 우르릉, 만화처럼 볼륨을 과장되게 증폭시킨 듯한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쾅! 늘어지는 듯한 파열음 비스무레한 것이 채 고막을 뜨기도 전, 물방울이 격자무늬 살이 달린 출입문에 들러붙었다.
“으아, 오늘 비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당연히 출근길에 우산 따윌 가지고 왔을 리도 없다. 하기와라는 창 바깥을 바라보며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막 카페를 나간 괴물 손님들이 얼굴로 떨어진 것이 물방울이 아니라 유황비라도 되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시늉을 하며 허겁지겁 디저트를 포장한 종이봉투를 우산 대신 머리에 덮어쓰고 급하게 차 시동을 거는 모습이 물방울로 인해 울룩불룩해진 유리 너머의 상으로 흐릿하게 비쳤다. 나는 어떡하지.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여서 퇴근할 쯤에는 멈추면 좋겠지만, 오늘은 그 희망과 반대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어째 그런 느낌이 든다.
낙담할 시간이 어딨겠냐는 듯 새 손님 두 명이 들이닥쳤다. 사실 손님이라기에는, 갑작스러운 비에 놀라 날개를 쉬어가는 참새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일 공산이 커 보이지만 말이다. 둘 다 키는 제법 있는데 얼굴은 앳된 것이 제 또래 같다고, 하기와라는 생각했다. 꽤 언밸런스한 조합이라고나 할까. 한 명은 가무잡잡한 피부에 연한 금발인 후드티, 다른 하나는 고양이처럼 뾰죽 올라간 눈꼬리에 단정하게 다듬은 갈색 머리카락인 맨투맨. 품에 꼭 안고 있는 비닐봉투 속에 척 봐도 두께로 어려움을 증명할 것만 같은 책들이 반투명하게 보였다. 친구끼리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날벼락, 아니 날폭우를 마주한 것 같았다. 봉투 너머로 책등에 적힌 글자가 언뜻 읽혔다. -찰행정론……. 어쩐지 오늘따라 경찰 지망할 것 같은 손님들이 많이 보이는걸. 하긴 공무원만큼 딴딴한 철밥통이 어디 있으랴 싶어 하기와라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비닐봉투의 아랫부분을 손으로 꽉 동여매고 거꾸로 세워 안아 달려온 덕에 책은 어찌저찌 지켜낸 것에 성공한 것 같지만……. 어쩐지 속옷마저도 물걸레처럼 쭉 비틀어 짜야 하지 않을까 싶은 두 청년에게 하기와라는 가볍게 위로하는 듯한 영업용 미소와 함께 다가갔다. 손에는 마른 수건 하나를 든 채로.
“이거라도 쓰세요.”
“아, 하하하……. 고마워요.”
하기와라가 건넨 수건을 받아든 것은 갈색머리 청년이었다. 꽤 날카로운 인상이라 생각했는데, 미소로 화답하는 것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외려 후드를 뒤집어쓴 채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터는 금발 남자 쪽보다도 훨씬 말 붙이기가 쉬워보인다. 그런데 웃기게도 갈색머리 청년이 받아든 수건을 금발 청년의 후드를 내려주고서 머리를 문지르자, 금발 머리 청년이 수건을 낚아채 갈색머리 청년의 얼굴을 사정없이 비비기 시작했다. 확실히 하기와라의 눈에도 후드를 쓰고 온 금발 청년보다는 갈색머리 청년 쪽이 훨씬 더 많이 젖은 모양새기는 했지만, 그들의 행동거지 자체가 ‘우리 친구예요’라고 말을 하는 듯한 상황이 웃겨서 하기와라는 속으로 열심히 웃었다.
“갑자기 이렇게 쏟아지네요…….”
“아- 역시 비 피하러 오신 거구나.”
“이 건물에는 편의점이 없는 것 같던데, 혹시 근처 지도 볼 수 있을까요?”
“여기엔 없지만 대각선 건너편 상가에 가보시면 있을 거예요. 저 쪽.”
하기와라가 실바니안 패밀리 완구가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가게 구석의 장식장 너머를 가리켰다. 갈색머리 청년이 가게 출입문을 열어 그 건물을 확인 후, 난처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문을 닫았다.
“달려가는 사이에 감기에 걸릴 정도로 젖어버릴 것 같네요……. 하는 수 없지. 잠깐 커피라도 마시고 갈까?”
“하지만 너 이따 형님이 나가노에서 온다고 마중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하하…, 그렇긴 하지만, 왠지 형이라면 늦는다는 전화보다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마중 갔을 때 더 잔소리할 것 같아.”
“흐음, 급하시면 우산 빌려드려요?”
이걸 진짜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느새 수납장 쪽으로 간 하기와라가 우산을 꺼내들었다. 상가 안쪽 복도로 통하는 문으로 상체를 빼어 우산을 쭉 펴 보면 이럭저럭 잘 펴진다. 우산살 둘이 고정이 되지 않아 삐져나오는 것이 볼품없어 보이지만, 적어도 갑자기 강풍이 휘몰아쳐 와 우산이 뒤집히는 불상사가 터지지 않는 이상 우산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데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이럭저럭 잘 펴지네요! 거의 반강제로 갈색머리 청년의 손에 쥐여주자 청년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꽤 절실했을 호의에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보송보송한 미소. 천연이랄까, 인기 있을지도 모르겠네. 저 금발 손님도 표정을 풀고 다니면 좋을텐데. 매사에 가벼운 하기와라다운 생각을 하며 그는 두 사람을 배웅했다. 물 웅덩이에 바짓단 끝이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뛰어가는 두 청년의 달리기를 보니 그의 권유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으로 부풀었던 마음에, 별안간 비명 소리가 꽂혀 풍선처럼 터졌다. 그것은 분명히 상가 안쪽 복도에서 울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웬 사건이 이렇게 많이 터진담! 하기와라가 급하게 문을 연다. 그리고 그 직후, 얼빵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이, 이걸 이렇게 분해하시면 어떡해요!”
“앙?”
“……진페이……, 너 뭐 하고 있냐?”
“뭐야, 하기. 내 분해 실력을 불신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러니까.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본격적인 세척을 위해 잠시 빼두었던 커피메이커가 마츠다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과거형으로 커피메이커였던 것이 되어 있었다. 그 참상을 운 나쁘게 목격한 오후반 알바생 오오사카가 보며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짓자, 하기와라는 퇴근 시간을 지연시킨 주범이라는 사실을 잠깐 묻어두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 위로해 주었다. 괜찮아. 내 친구는 자기가 뜯은 건 자기가 죽어도 고치니까. 아무튼 대타해 줄 사람이 왔으니 오늘의 남은 스케줄은 이 말썽구러기 분해마 녀석과 누나와 함께 모처럼 식사를 나가는 일밖에 없다. 쾌재를 부르며 앞치마를 풀면서도 하기와라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능숙하게 볼트와 나사와 기타 부품을 끼우고 재조립하는 마츠다를 내려다보았다.
“뭐 분해 해볼만한 고물이 없나 해서 찾아보다가 이런 재미난 게 보이잖냐. 그래서 분해했다. 그 뿐이라고.”
“점장님이 대대적으로 세척하려고 내놓은 기계였지만 말이야.”
“너한테까지 그런 잔소리 듣고 싶지 않아. 기껏 우산도 갖고 왔구만.”
“뭐야, 진페이 너 일기 예보 알고 있었어?”
“아니, 그냥 오는 길에 쏟아져서 마침 가까이 있던 편의점에서 산 거지 뭐. 너도 없을 거 같았고. 어차피 같이 밥 먹으러 가는 거 겸사겸사 마중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고.”
“푸하핫, 땡큐. 근데 진페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 알아?”
“야, 내 우산에 들어올 생각 마.”
질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이따금 저보다 눈높이가 낮은 마츠다의 키를 가지고 놀리는 일은 그들 사이의 단골 담소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하기와라는 대부분의 키 큰 사람들이 그러하듯 키가 크고 작고를 신경써 본 일은 없지만, 마츠다가 이따금 의식하는 듯한 발언을 할 때면 괜히 발동하는 자신의 장난기를 스스럼없이 즐기는 편이었으니까. 이봐요.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목소리 틈바구니를 비집고 오늘 중에 한 번은 들어봤을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와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 우산을 가지고 간 사람들이다. 후드티, 금발. 의외로 금발 쪽이 뜻밖에도 먼저 말을 걸어온 사실에 하기와라는 속으로 탄성을 가볍게 질렀다.
“어라, 아까 그 손님이네.”
“자요.”
금발 청년이 두 개의 우산을 내밀었다. 하나는 하기와라에게서 빌려갔던 우산, 다른 하나는 방금 막 산 티가 팍팍 나는 비닐 우산이다. 빌려준 당사자도 아닌 마츠다는 멋대로 그 비닐 우산을 받아들어 멀뚱멀뚱, 두 사람이 선 방향의 반대쪽에 대고 쫙 펴본다. 비닐 우산 특유의 플라스틱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하하, 고마워요. 근데 진짜 안 돌려주셨어도 됐는데.”
결과론적으로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돌려받을 것을 상정하고 빌려준 적 또한 없었다. 하기와라의 말에 금발 청년은 뚱한 표정을 그대로 고수하며 꿍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불편해서요. 저 녀석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렇게 말하며 턱짓으로 바깥에서 똑같은 비닐 우산을 쓴 채 기다리고 있는 갈색머리 청년을 가리켜 보인다. 갈색머리 청년은 상가 건너편의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듯 이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아까 전의 이야기를 통해 추리해보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버스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겠거니 싶어 그런대로 납득했다. 아무튼 전달했어요. 금발머리 청년이 대충 손을 흔들며 떠나자, 이번에는 마츠다가 물었다.
“누구야?”
“어엄-, 어쩌면 우리 동기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
“뭐야, 경찰 지망생? 너 또 하라는 서빙은 안 하고 손님들이랑 수다나 떨고 그랬냐.”
“에이, 누가 들으면 내가 만년 농땡이나 치는 날라리인 줄 알겠다. 그리고 얘기 별로 할 것도 없이 책 들고 있던데?”
“흥, 어쩐지 맘에 안 들어.”
“뭐, 진페이가 싫어할 만한 인상이긴 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하는데.”
“일단 너보다 크다는 게? 쬐끔이지만.”
“야, 이리 와. 이리 안 와?”
“하하하, 싫은데! 그보다 진페이, 해야할 게 있지 않아?”
일부러 허점 투성이로 내지르는 친구의 펀치를 허점 투성이로 피하며 하기와라가 커피메이커를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였다. 이미 멋대로 휴대폰을 분해해봤다가 눈탱이가 밤탱이로 되는 마법을 겪어본 마츠다는 부루퉁한 표정 그대로 커피메이커를 원상복구하는 작업에 다시금 착수한다. 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으니까 도와줘볼까. 하기와라가 나란히 마츠다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오늘 일 어땠냐? 어, 꽤 재미있었어. 오늘 가게 앞에서 날치기범 소동이 있었는데…….
그들의 머리 위로 할로윈 장식을 위해 걸어둔 호박 전구가 주홍빛으로 먹음직스레 달궈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