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환비연(樺渙悲緣)
written by. 사련(소은하)
할로윈을 일주일 앞둔 경찰청이란 시민들의 행복한 할로윈을 위해 할로윈 유령이 아닌 야근 유령 역할을 도맡는 기간이다. 관광객 증가와 더불어 소매치기 및 각종 치안 범죄율까지 상승하기 때문에 많은 경찰이 투입되어도 손이 부족해 공안부까지 지원요청이 내려오곤 했다. 그렇다고 경찰청 내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건 아니다. 할로윈 철자 프린팅이 돋보이는 쇼핑백에 사탕과 초콜릿을 준비해 함께 나눈다던가, 커피 한 잔을 곁들이며 할로윈 축제에 대해 짧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정도는 업무태만에 속하지 않았다. 복도 게시판에 붙여진 [안전 무사고, 해피 할로윈을 위하여!] 라는 문구를 지나 사무실 문에 붙어있는 주먹만 한 할로윈 호박 인형을 검지로 한 번 눌러주곤 자리에 앉는 후루야 레이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보고해, 카자미.”
“아직은 지원요청 외에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만…. 아,후루야 씨, 경찰학교 뒷산에 있던 신사 기억나십니까?”
“갑자기? 담력 시험을 치렀던 신사라면…. 물론.”
걸을 때마다 삐걱대던 마룻바닥과 나무 향이 그윽했던 계단, 경찰학교 학생들이 벌점을 메울 겸 몇 번을 청소해도 이상할 정도로 거미가 나왔던 곳. 그래서일까. 신사 쪽을 지나면 여학생들의 비명이 드문드문 들리던 때를 떠올리며 후루야는 그가 건넨 서류에 시선을 두었다.
“이번에 아예 없어진다고 합니다.”
“신사가?”
“네, 거기 주지 스님이 반년 전에 타계하셨기도 했고 워낙 경관이 좋은 곳 아닙니까. 지자체에서 오래전부터 개발 눈독을 들이던 곳이라….”
말로는 호텔을 짓는다는데 아쉽게 되었다며 말하던 카자미의 어깨는 쳐져 있었다. 후루야는 서류에 서명하면서 그가 신사에 추억이 많은 편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꽂힌 난데없는 비명에 웬 소란이냐는 듯 후루야의 눈썹이 불평을 담은 채 씰룩였다.
“흐악! 그럼 타임캡슐은 어떡합니까? 담력시험을 마치면 타임캡슐을 묻는 행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제 것도 아직 묻혀있는데!”
“그러고 보니….”
경찰들만 받을 수 있는 할로윈 선물이라는 거창한 별칭을 가진 타임캡슐은 경찰학교의 유구한 전통이었다. 경찰이 되어서도 경찰학교에서 배우고 새긴 초심을 잃지 말자는 의미가 담긴 행사로 10년 후의 할로윈 시즌에 개봉되어 전달되곤 했다. 아직 카자미도 후루야의 타임캡슐도 세상에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기억이 맞는다면 자신은 만년필을 묻었고 누군가 사진을 묻었던 것 같은데. 완벽한 트리플 페이스를 유지하는 지금, 그때의 사진은 추억이라기보다는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에 가까웠다. 깜빡 잊고 있던 과거의 조각이 난데없이 후루야를 치고 만다.
“카자미, 가지.”
“예!?”
"뭐해, 안 따라오고."
의자에 걸쳐둔 코트를 집어 어깨에 걸친 채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가는 후루야 뒤를 카자미가 서둘러 쫓았다.
“타임캡슐에 후루야 씨가 찍힌 사진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묻은 건 아니지만 말이야. 더군다나 공안부는 상상도 못 했을 때고.”
“확실히 누가 먼저 보게 된다면 곤란한 일이네요. 아, 여기서 우회전입니다.”
그러면 사진 보여주시는 겁니까? 보여줄 리가. 같은 짤막한 대화가 엔진소리와 어우러지다 그치면 완연한 가을풍경 아래 세월의 흐름을 맞은 신사가 두 사람을 반겼다. 걸음걸이마다 바스락대며 밟히는 낙엽이 색과 형태를 잃어갔다. 후루야는 그것이 자신을 닮은듯해 잠시 시선을 발끝에 두었다.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신사는 고요하기만 했다. 이따금 들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반가움을 표할 뿐.
“이 벚나무도 그대로군요.”
카자미가 신사 입구 한쪽에 자리한 큼지막한 벚나무에 손을 올리곤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후루야는 그런 카자미의 모습 속에서 데자뷰를 느꼈다.
『 조장- 왜 이 나무는 벚꽃이 피지 않아? 』
『 병들었대. 주지 스님께서도 꽃을 못 본 지 오래돼서 아쉬워하시더라고. 』
『 어쩐지 불쌍하네. 』
금방이라도 돌아보며 자신을 향해 웃어 줄 것 같은 친구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적막만이 감돌았다.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된 벚나무에서 시선을 돌린 후루야는 추억을 억누르듯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타임캡슐은 어떻게 찾죠? 저희는 묻은 곳을 모르지 않습니까?”
“잘 생각해봐. 경찰학교 입학생은 매년 나와. 매해 생기는 타임캡슐을 전부 땅에 묻어놓고 관리하기도 어려울 테고 공간이 부족하지 않겠어?”
경찰학교 다닐 때 교무실도 자주 불려 다닌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타임캡슐을 들일만한 널찍한 공간은 본 적이 없었으므로, 분명 교관들이 신사에 보관하고 있다가 경찰청과 경시청으로 보내고 있던 게 분명하다고 추론했다. 후루야는 주변을 빙 둘러보다가 검지로 별관을 가리켰다. 본관 건물과 다르게 인적도 드물어 보이는데 문에 자물쇠가 두 개나 단단히 걸려 있었다.
“이를테면 저런 곳에 말이야.”
“으윽, 부시면 기물파손일 텐데요….”
신사라 되도록 얌전히 가져가고 싶은데 라는 카자미의 희망 어린 중얼거림에도 후루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에 발차기를 날렸다. 목재로 만들어진 문이 튼튼해 봤자였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 한 짝이 아예 넘어가 버리면 카자미는 절로 이마를 짚게 되었다. 어차피 신사는 철거될 예정이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자기합리화를 거치곤 한 번만 봐달라며 신사가 모시던 신을 향해 마음속으로 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후루야가 먼저 안으로 향했다. 올라오는 잔 먼지 때문에 허공에 손짓을 휘두르며 기침을 뱉고 나면 기록보관소처럼 선반에 상자들이 빼곡하게 정리된 광경이 보였다. 각각의 상자 위에는 입교식 날짜와 기수가 기록되어 있었으니 분명-
“찾았군.”
“이곳 자체가 경찰학교의 숨겨진 보관소였군요?”
후루야의 발걸음이 맨 안쪽 선반 두 번째 줄 상자 앞에 멎었다. 숨을 들이켜더니 양손으로 상자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열어보면 온갖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츠다가 어릴 때 수십 번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했다던 손바닥만 한 미니 자동차, 자동차 수리공장 판촉물로 제작했었다며 들고 다녔던 라이터는 하기의 것, 벚꽃이 수 놓인 오마모리 핸드폰 줄을 넣으며 웃었던 히로. 자신을 포함한 다섯 명이 `담력 체험 미션 클리어!` 라며 행복한 모습으로 멈춰있는 사진을 넣은 건 다테였다. 후루야는 과거의 자신이 넣었던 검은색 만년필까지 챙기곤 굽혔던 상체를 일으켰다. 반가움도 잠시, 원래 목적을 되찾아야만 했다. 추억들을 까맣게 그을릴 시간이었다.
『 방금 찍은 단체 사진을 타임캡슐에 넣다니 아깝지 않아? 』
『 괜찮아. 교관님께 부탁해서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놓았거든. 』
『 오오, 역시 히로~ 근데 레이는 만년필이야? 』
『 만년필이 어때서. 이상한 걸로 따지면 미니 자동차가 더…. 』
『 아앙? 내 선택에 불만 있냐? 』
두 손 가득 쥐어진 물건들이 타임머신처럼 기억을 되감아 주면 때로는 너무 아껴도 좋지 않은 결과를 맺는다고 생각했다. 사무치게 그리워지게 되어서야 보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렇게 마주하고 나니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아서.
“이것들만 태우고 가지.”
“사진은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어째서…….”
“주인에게 돌려주는 거다.”
카자미는 아, 하곤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한 채 후루야의 모습을 조용히 눈에 담는 걸 택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한 줌의 기름이 연결된 듯 하기의 라이터에서 불이 켜졌다. 후루야는 담담하게 낙엽을 모은 뒤 사진 모서리 끝에 불을 붙여 그 위에 내려놓았다. 작은 불씨가 우직한 다테와 어깨동무한 마츠다, 하기의 윙크를 삼키고 히로미츠의 미소를 먹으며 점점 커졌다가 자기 얼굴까지 지우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과정을 놓치지 않고 봐야 한다는 사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눈을 떼지 않았다.
손에 쥔 라이터와 미니 자동차를 불 속에 던지지 못하고 코트 주머니에 넣은 것은 마저 태우지 못한 미련이었다. 아직 기름이 남아 있었고 배터리가 탑재된 장난감이라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거창한 핑계 아래 휘발되지 못했다. 만년필은 쉽게도 불 속에 던졌으면서 핸드폰 줄을 쥐고 있던 손은 힘을 잃고 천천히 내려졌다. 그대로 후루야 레이는 몸을 돌렸다. 끊어낸다고 마음을 끊어낼 수 있었다면 이토록 가슴 깊이 괴로울 리 없었다.
후루야가 사진을 태우는 동안 쓰러져 있는 문짝을 잘 세워놓은 카자미는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내용을 들어보면 신사가 철거될 예정이니 타임캡슐을 경찰학교에 옮겨달라는 배려심 어린 전달이었다. 수많은 경찰의 추억을 잃어버리게 두긴 싫었다며 겸연쩍게 내미는 목소리에 후루야는 구둣발로 남은 불씨를 꺼트리며 끄덕였다. 두 사람의 모습은 각각 다른 추억에 젖었으나 밀려오는 현실은 고독하여 메마른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이 녀석-? 아무리 할로윈이라지만 곤란하다고.”
차 문을 열려다 작은 거미가 백미러에 거미줄을 친 걸 발견한 카자미는 거미를 쳐내려 손을 뻗었다. 후루야가 카자미를 저지한 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후루야 씨?”
“...신사니까. 살생은 피해야지.”
후루야는 손등에 작은 거미를 태우더니 벚나무 위로 옮겨주었다. 이것도 변덕이라면 변덕일 테다. 오늘따라 건조하게 굴지 못하고 미련이 덕지덕지 묻은 자신을 돌아보자니 칼 같지 못한 모습들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낯선 시선이 느껴져 후루야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왜 그러냐며 덩달아 경계심이 오른 카자미 외엔 사람 흔적 하나 드러나지 않았다. 여러모로 신경을 써서 그럴 것이라 치부하곤 신사를 벗어났다. 얇은 거미줄 하나가 코트에 붙어 길게 늘어진 건 알아채지 못하고 자동차가 신사와 멀어지면 후루야 레이, 아무로 토오루, 버본. 어느 쪽으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할로윈의 막이 올랐다.
*****
“선발대가 이쪽 계단을 통해서 진입하면, 맞은편 건물의…. 콜록, 저와….”
“버본, 네가 아플 때도 있어?”
“저도 사람입니다, 베르무트.”
“어머? 잠깐, 열이 있잖아?”
베르무트가 버본의 이마에 손등을 대더니 호들갑스럽게 난색을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르무트를 막으려 한 손이 엇나간 탓에 한 방 먹은 것이었지만. 할로윈 가장 파티에 참석해 타깃을 없애라는 임무를 실행하기 위해 모인 후루야, 아니 버본은 할로윈 전야에 열감기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빠져라, 버본.”
“콜록콜록, 문제없으니 그냥 진행하시죠.”
“방해다.”
“그럴 리가요.”
“훗…. 실수하면 널 없앨 좋은 구실이 되겠군.”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거만한 진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후루야는 의자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입술은 곧장 열렸으나 잦은 기침으로 인해 몰아 내쉬는 숨소리가 숨겨지지 못하고 무전에 실릴 것까지 예측하면 만용이라는 판정이 섰다. 후루야는 달갑지 않다는 기색을 비쳤으나 워커까지 진의 편을 들며 말리는 바람에 이 이상 나섰다간 모양새가 영 이상할 상황이 되어 고개를 반쯤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스에겐 내가 말해둘게. 목소리도 점점 가라앉는 걸 보니 오래갈 것 같은걸? 원래 내 키스 비싼 거 알지? 나으라고 해주는 거야.”
해피 할로윈~ 이란 꼬리표가 붙은 베르무트의 손 키스를 뒤로한 채 건물을 나서면 두 블록쯤 지나서야 후루야 레이라기엔 위태롭고 아무로 토오루라고 할 수는 없는 존재가 되어 인파 속에 묻혔다. 얼마나 걸었을까. 후루야의 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멋대로 울렁대다 번지는 것 같이 보였다. 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처럼 이리저리 왜곡되어 보여 비틀대며 걸음을 서두르려다 몸이 휘청이고 만다. 다행히 누군가에게 팔이 붙들려 넘어지지는 않았다.
“저기 조심하셔야-. 앗, 아무로 씨? 괜찮으세요?”
“좀 이상한데? 아무로 형, 제 목소리 들려요!? 정신 차려요!”
“아빠-, 빨리 좀 와보세요! 아무로 씨가 이상해요!”
익숙한 목소리들에 안도를 담은 입꼬리가 힘없이 올라갔다. 멀리서 뛰어오는 코고로의 모습과 귓가에 윙윙대는 코난과 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후루야의 시야가 훅 꺼지고 말았다. 어디까지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없이 떨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몸에 힘 하나 들어가지 못했다. 사실 무리하고 있던 걸까.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난.
『 누가 그딴 생각을 가지래!? 안 본 사이에 머저리가 다 되었잖아! 』
『 진페쨩 진정해…. 』
『 아오. 이거 놔봐! 저 자식 쥐어패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야지! 』
『 이제 곧 병원이라 괜찮을 거야. 조금만 힘내자. 응? 』
『 심각한 건 아니라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 』
누군가 자신을 업은 채 달리고 있는 건지 들썩이던 몸이 기울어지면 덜컹거리는 소음과 사이렌 소리가 축제가 한창인 길거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구급대원과 대화하는 코난과 코고로 목소리 사이로 존재할 리 없는 이명이 엉켰다. 열에 취해 헛것이 들려도 유분수지. 꿈에서도 그리지 못해 사무치게 바랐던 목소리들인데 막상 들으니 후루야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비감스럽게 다가왔다.
『제로 많이 아파? 어떡하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까워하며 계속 걱정하는 목소리의 주인은 히로였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지막까지 이름을 부르지 못한 나의 친구여. 환영 같은 총성이 할로윈의 악몽처럼 급습하면 발작하듯 후루야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히,ㄹ….”
“환자분, 정신 드십니까? 들리시면 대답하세요―”
“이거야 원, 병원은 아직 입니까? 멀쩡했던 녀석이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 지금 우리 목소리를 들은 건 아니겠지? 』
『 에이, 설마- 』
“아무로 형….”
순간 삐-하는 주파음이 정신을 소란스럽게 했다. 나아가 그 소리까지 먹힌 듯 사방이 무(無)처럼 변했다. 침전하는 모든 것들에는 소리도 빛도 없다. 후루야가 눈을 뜨려고 애써도 두 눈에 풀칠이라도 된 것처럼 눈이 뜨이지 않았다. 꼭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느낌도 들어 이제는 자신이 누워있는지, 서 있는 건지 분간도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 일어나, 레이. 야…. 너 진짜 걱정되게 이럴 거야? 』
이렇게 혼몽한 상황 속에 툴툴대던 마츠다 목소리마저 걱정이 묻어 나오면 울컥하는 감정의 파도가 후루야를 너울지게 했다. 악몽이든 뭐든 진짜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풍선처럼 부풀면 낯선 울림이 귀를 간질였다.
【 그게 소원이야? 】
“...그래.”
‘소원’이냐며 던져진 물음은 미상의 여인으로부터 흘렀다. 먹먹하게 대답하고 나면 견고한 후루야 레이의 영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굴레에 금이 가는 순간이 온다. 거미줄같이 퍼지는 실금 사이로 처절하게 숨겨둔 마음들이 조각비가 되어 내렸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해…. 보고 싶었다고. 실은 많이 궁금했어, 너희도 나를 생각하다 밤을 지새운 적이 있는지, 혼자가 된 지금의 나를 보며 초조해 하거나 혹시나 그날…. 나를 원망하지 않았느냐고.
비통하게 부서진 마음들을 제대로 이어 붙이지도 못한 채 몇 번을 베여도 끌어안고 있던 이였다. 뺏기지 않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그래선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떠나버린 친구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어왔다. 자신의 아집에 삶이 짓눌릴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득바득 이를 악물며 견딘 오늘이다. 혼자만의 생(生)이 아니었으므로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다.
【 그렇다면 불러보도록 해. 】
서늘하지만 다정을 담은 온도가 그의 몸을 훑었다. 쓰다듬다 물러나는 손길은 고왔고 마치 아이를 달래는 행위를 닮기도 했다. 비단 같은 게 접히다 끌리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렸기에 후루야는 그녀가 후리소데를 입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런 것들이 중요한 건 아니었고 진상을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렇게 쉽고 덧없게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었는데 삶의 의미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히로, 하기와라…. 마츠다. 조장.”
“제로, 우리가 보여?!”
편안히 떠진 후루야의 두 눈에 달무리가 지고 그리움이 알알이 맺혔다. 병실에 모여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는 너희를 보니 그게 그렇게 슬펐다고, 심장이 멎은 것만큼 아프고 서글퍼 죽겠는데 뭐가 좋다고 웃냐며 내미는 투정은 오랜 시간을 굴러온 소금 결정이라 짠 내투성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몸처럼 안겨들면 입술이 바들대며 열렸다.
“너희들…. 모두 보고 싶었어.”
할로윈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높이 솟았다. 병실 안까지 환한 빛이 번쩍였고 하늘을 수놓던 불꽃이 사라져도 친구들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벅차고 아름다운 세상이 후루야 레이에게 돌아왔다. 그는 오늘만큼은 1초가 하루처럼 흘렀으면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풀어놓고 싶은데 떨리는 마음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바보처럼 웃다가 친구들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들기도 했고,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말을 내밀어 혼나기까지 했다. 그래도 좋았다. 정말 미쳤다 해도 상관없을 만큼. 잃어버린 색을 되찾은 것처럼 그의 영혼은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함께 하는 동안 열린 창가 너머에는 할로윈 축제가 한창인 듯했지만 바람은 불지 않았다. 침대 옆에 놓인 꽃병과 물 잔부터 친구들의 발밑까지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 걸 깨달았을 때 왼쪽 손목에 매인 무언가가 후루야의 눈에 밟혔다.
“이게 뭐지? 팔찌도 아닌 게…. 거미줄인가?”
못다 한 말을 풀어내느라 한참을 떠들던 친구들의 웃음기가 순간 줄어들자 후루야는 기이함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기실, 외면하고 있었을 뿐 지금 펼쳐진 상황 중 이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소원이냐고 물었던 여성은 보이지도 않았으며 손목에는 알 수 없는 얇은 거미줄이 팔찌처럼 매여 있었다. 그 끝은 병실 문틈 너머까지 이어져 있는 듯했는데 후루야 레이는 그것이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냉철한 눈빛으로 의심스럽게 거미줄을 살피다 잡아당기면 어딘가에 연결된 것처럼 아슬아슬한 목소리가 실을 타고 흘렸다.
『 카자미. 바로 병원으로 갈 거야? 식사는 하고 가지 그래? 』
『 금방 깨어나실 거라 준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고 있으니까요. 』
“얘들아. 나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는구나…. 그렇지?”
우리의 행복에는 제한 시간이 있었다. 야속한 시곗바늘 소리 아래 억지로 붙들 수 없는 황홀함이 기어이 한 생을 내도록 울게 만들고 만다. 후루야 레이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그것이 나아가야 할 길이었기에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나라를 지켜온 경찰관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돌아가야 해,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자식, 이럴 때만 멋있는 척이야~”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거야, 다들 바보 아니냐며 후루야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 다테와 마츠다가 양옆에서 부축해주었고 히로는 병실 문을 열어 문고리를 잡아주었다. 한 명 한 명 담아내는 눈맞춤은 우리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당당히 걸어 나가는 후루야의 뒷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던 하기가 뭔가 생각난 듯 뒤늦게 손뼉을 치곤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레이는 어떻게 우리를 볼 수 있던 거야?”
“너희가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어?”
길지 못한 시간의 너희를 만나 행복했던 순간을 몇 번이고 새기며 살아왔다고. 그러니 다음엔 봄이 더 잘 보이는 곳에서 만나자는 후루야 레이의 마음은 분명 전해졌으리라. 약간의 의문을 거미줄에 남긴 채. 그러나 반드시, 재회하고야 말- 연(緣)이 되어.
*****
후루야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삼 일이나 지난 뒤였다. 과로와 독감이 어우러진 병명은 다 큰 녀석이 건강을 어떻게 돌본 거냐는 코고로의 잔소리 한판을 불러낸 덕에 퇴원에 장렬히 실패하고 만다. 어린이 탐정단이 쾌유를 빌며 색종이를 접어 만들었다던 할로윈 장식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상기시켰다. 거미 장식을 보곤 어색하게 반응하는 후루야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코난이 물어보자 정신을 잃었던 동안 거미줄에 얽힌 이상한 꿈을 꿔서 그렇다며 얼버무린 것을 시작으로 병실 안은 때아닌 요괴 얘기로 들어찼다.
“꿈에서 거미줄을 만졌다고요? 그러면 거미가 화를 내는데!”
“혹시 조로구모가 도와준 게 아닐까?”
“조로구모?"
“아! 아유미 그거 알아! 거미 요괴인데 엄청 예쁜 여자 모습이랬어, 맞지 코난?”
후루야는 초등학교 1학년 애들이 눈을 반짝이며 얘기할 내용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을 걱정해 병문안 온 아이들을 생각해 구태여 대화 주제를 돌리는 않았다. 요괴라니. 퍽 아이들다운 상상이기도 했고.
“맞아. 인간을 죽이는 못된 요괴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고 살기는 해도 목숨을 해치지 않을 정도만 하거나 길을 잃은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기도 한대.”
“정말? 그러면 완전 나쁜 요괴는 아니네?”
코난과 하이바라가 매점에서 사 온 음료수를 나눠주며 한마디씩 거들면 역시 할로윈에 나타난 조로구모일 확률이 높다는 미츠히코의 목소리와 그럼 장어 요괴도 있지 않을까? 엄청 많이 먹었는데- 라는 겐타의 엉뚱한 말로 인해 병실이 썰렁해지기도 했다.
“제법이구나, 얘들아. 그럼 이건 아니? 요괴에게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단다. 특히 인간에게 목숨 빚이 달리면 꼭 갚아야 한다고 하지.”
“박사님도 참- 어떤 인간이 요괴를 살려줘요?”
“글쎄, 애초에 요괴 같은 건 없다고요.”
“아하하. 전 그런 비과학적인 건 믿지 않아서….”
건네받은 음료 캔을 손으로 따며 후루야는 새롭게 끌어안은 추억을 곱씹어보곤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할로윈이라면 괜찮을지도요.”
후루야가 허공에 건배하듯 캔을 들었다가 홀짝이면 달콤 쌉쌀한 오렌지 주스가 목구멍을 따라 여운을 남기고 삼켜졌다. 잠시 두 손으로 캔을 잡곤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10월의 벚꽃처럼 만났다고 생각할게. 안녕.
화환비연 (樺渙悲緣),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