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의 교차
written by. 연화
0.
꿈을 꿨어.
너희와 안녕하는, 아주 슬픈 꿈을.
1.
“-안녕히 가세요!”
아즈사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 후루야가 홀을 내다보았다. 저녁 시간쯤 방문했던 중년 부부가 포와로를 나서고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급히 인사를 덧붙이기가 무섭게 문이 닫힌다. 딸랑, 울려퍼지는 종소리가 유독 크다는 걸 인지하고 나서야 가게 내에 손님이 없음을 알아차린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넋을 놓고 있던 사이 시간이 제법 흐른 모양이었다. 착잡함에 뻐근해진 목을 몇 번 주무른 후루야가 시계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라스트 오더 시간까지 겨우 3분 가량을 남겨두고 있었다. 실질적인 영업은 이미 끝났다고 봐도 될 시간이었다.
이제 그만 마감할까요, 제안하려던 후루야가 의자를 꺼내 앉는 아즈사를 보고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3분이란 여유 시간을 착실히 보내려는 모양이었다. 잠시나마 숨을 돌리고 싶은 걸지도. 냉수 한 잔을 들고 걸어나가자 아즈사가 고단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아즈사 씨.”
“아무로 씨도요.”
10월의 마지막 날, 할로윈. 영업을 마친 포와로 내에서 두 알바생이 지친 낯으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평일치곤 손님이 참 많았던 하루였다.
물잔을 감사히 받아든 아즈사가 달게 목을 축였다. 평소라면 먼저 건넸을 감사인사는 컵을 모두 비운 후에나 나왔다. 앓는 소리는 덤이었다.
“진짜 엄청 바빴네요. 할로윈이 대체 뭐라고…”
중얼거린 아즈사가 테이블 위 호박등을 끌어다 톡톡 두들겼다. 아담한 사이즈의 플라스틱 등이 손가락에 쫓기며 통통 소리를 냈다. 그렇게 괴롭히길 잠시, 흥미를 잃은 아즈사가 다른 대상을 물색하고자 가게 내를 훑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따라 후루야도 가게 내를 한 번 훑었다. 호박, 마녀, 박쥐… 그리고 유령. 유령 모양 인형에 시선이 멈춘다. 후루야의 낯이 조금 어두워졌다. 간밤에 꾼 꿈 내용이 떠오른 탓이었다.
잃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꿈. 그리고 차례차례 잃는 꿈.
영원을 꿈꿨던 청춘에 마침표를 찍은 하기와라가 떠나고, 전설이 된 마츠다가 그 뒤를 이어 사라지고, 단발의 총성과 함께 히로의 숨이 끊기고, 죽은 줄도 몰랐던 다테가 그런 히로를 데리고 떠나가는…
“…무로 씨. 아무로 씨?”
“아, 네.”
“그 인형 뚫어지겠어요. 걔랑 뭐 원수질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뇨, 어쩌다보니…”
겨우 잡념을 떨친 후루야가 멋쩍게 웃었다. 그런 그를 아즈사가 걱정스레 바라보다 입을 뗐다.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보여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그냥…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날이라니, 누군가는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요.”
“음… 그렇게 생각하면 할로윈은 조금 슬픈 날이네요.”
“기쁜 게 아니라요?”
“다시 이별해야 하니까요. 이별은 몇 번을 겪어도 힘들고 아프잖아요.”
생각지 못하게 아픈 곳을 찔린 후루야의 표정이 조금 무너져내렸다. 때마침 아즈사가 고개를 돌렸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음 다소 곤란했을 정도로 감정이 울컥 샜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루야가 겨우 태연한 낯을 뒤집어썼다. 이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랄지, 슬슬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만 정리하고 들어갈까요?”
“헛, 시간이 언제 이렇게.”
“홀 정리와 청소 좀 부탁해요. 설거지와 재고 정리는 제가 할게요.”
“좋아요!”
갑자기 씩씩해진 아즈사를 보며 비로소 웃은 후루야가 마감을 서둘렀다. 얼른 집에 보내주지 않으면 여기에도 유령이 하나 추가될 것 같다는, 웃음기 한 스푼 섞인 생각을 하면서.
2.
“정말 마저 바래다주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에이, 여기서 저기 가는 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여기까지 데려다주신 걸로 충분해요! 고마워요, 아무로 씨."
“그럼…저도 이만 가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즈사 씨도요.”
귀가하는 아즈사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배는 빨라보였다. 저렇게 힘찰 수가. 해방감을 역력히 드러내는 뒷모습에 후루야가 작게 웃었다. 그 뒷모습이 점점 작아져, 이내 건물에 들어서는 것까지 확인한 그가 이내 돌아섰다. 이제부턴 후루야 레이의 시간이었다.
카자미와의 접선 날짜부터 베르무트로부터의 의뢰까지, 밀물처럼 밀려드는 일 생각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후루야가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여기서 방까진 도보로 약 20분 남짓. 생각을 정리할 겸 걷기에 나쁘지 않았다.
취했는지 비틀대는 중년의 사내, 쓰레기통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 바쁘게 귀가하는 유령 탈 쓴 여성… 빠른 걸음으로 모두를 지나치며, 후루야는 어둠 속 호박빛으로 빛나는 거리를 홀로 걸었다. 수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나름의 발버둥이었다.
멘션으로 가는 길목의 마지막 횡단보도 앞에 선 그가 신호를 확인했다. 오른쪽 신호가 끝나면 다음은 왼쪽, 그 다음이 이쪽. 50초 정도는 꼼짝 없이 서있어야겠군. 작게 혀를 차던 후루야가 배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힐끗거렸다. 모자로 보이는 성인 여성과 어린 아이 하나가 손을 맞잡은 채로 그의 뒤에 섰다. 아이 손에 들린 사탕바구니는 묵직해보였다. 만원 선장이군, 웃던 와중 아이와 시선이 맞닿았다.
씨익 웃는 아이의 눈에서 장난기를 읽은 후루야가 제 외투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남은 간식이 하나쯤은… 이런, 없네. 소소한 낭패감을 느끼며 돌아선 그가 아이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 가다렸다는 듯 아이가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곤 외쳤다.
“Trick or treat!”
다정히 미소지은 후루야가 제 겉옷 주머니를 뒤집어보였다.
“과자가 없는데 어쩌지?”
“그럼 장난!”
이번엔 아이가 자기 바지주머니 안에 오동통한 손을 넣고선 휘적거렸다. 오늘 하루 자주 있었던 일인지 아이 엄마는 아이를 제지하는 대신 못말린다는 듯 웃고 있었다.
찾았다, 중얼거린 아이가 후루야의 손을 잡아채갔다. 무얼 하려나 싶어 지켜보던 그의 손등에 유령 그림 스티커가 붙었다. 또 유령인가… 오늘 하루 지겹도록 보았던 디자인에 후루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바들거렸다.
웃음이 어색해지기 전 다행히도 신호가 바뀌었다. 아이 엄마가 아이와 맞잡은 손을 슬쩍 당겼다. 더 놀고 싶은지 못내 걸음을 떼던 아이가 후루야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형아, 안녕!”
“안녕. 해피 할로윈.”
아이에게 인사한 후루야가 작게 묵례를 건네는 아이 엄마에게 덩달아 꾸벅 숙였다.
한 걸음 먼저 앞서 걷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그도 걷는다. 엄마, 집에 가서 이 젤리 먹어도 돼요? 아빠한테 이만큼 받았다고 자랑하려면 내일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오가는 대화가 다 들리는 거리였다.
어쩐지 속이 조금 쓰려, 눈을 반쯤 내리깐 후루야가 무표정한 낯으로 횡단보도를 마저 건넜다. 아주 잠깐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올랐다가… 더 생각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으리란 직감에 생각을 멈춘다. 잡념 대신 생산적인 활동을 하자. 그래, 그게 낫겠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골목길에 들어서던 중 어디선가 빛이 샜다. 핸드폰 불빛인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확인한 후루야가 곧 당황했다. 빛은 후루야의 손등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등에 붙은 유령 스티커가 빛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요즘 스티커엔 발광 기능도 있나? 당황한 후루야가 스티커를 자세히 살피고자 팔을 들었다.
번쩍, 그와 동시에 엄청난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그가 사그라드는 듯한 빛에 조심스레 실눈을 떴다. 완전히 사그라들었음을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눈을 떠 다시금 손등을 확인했다. 문제의 스티커는 언제 빛이 났냐는 듯 얌전히 붙어있었다.
방금 그 빛은 대체 뭐였지… 의문을 품은 후루야가 스티커를 한참 살폈으나 별다른 특이점은 찾아내지 못했다. 얼마 안 가 단념하곤 손을 내린다. 발신기나 도청기가 설치된 것도 아닌 것 같으니 나중에 마저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은 얼른 들어가자. 그렇게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어?”
미지를 조우한 사람처럼 그는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아무로 토오루 명의의 방이 있는 멘션 대신, 으슥한 골목길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이게 대체…”
분명 방금 골목길을 빠져나왔을텐데. 왜 또 골목길이 놓여있지.
드물게 머릿속이 텅 비었다. 금방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혹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파도마냥 너울지는 곤혹을 애써 가라앉힌 후루야가 귀갓길을 되짚어보았다. 중간에 잘못 든 건 아닌지, 혹여 길을 착각하진 않았는지.
몇 번을 복기해보아도 결론은 같았다. 제 앞에는 분명 멘션이 나타났어야 했다. 설마 오늘 반나절 사이 누가 길을 갈아엎었나? 남들보다 피로에 강할 뿐 영향을 안 받는 건 아닌 후루야가 침착하게 헛생각을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건 길이 마냥 낯설진 않다는 건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던 그가 골목길 끝에 있는 낯익은 건물을 발견했다.
“…경시청?”
집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건물이 왜 저기 있어. 무의식중에 발길이 이리로 닿았나…?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마를 짚은 후루야가 근방 지리를 눈으로 훑었다. 상황을 한탄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어디서 잘못 들었는지는 돌아가면서 생각하자. 결정한 후루야가 경시청을 등졌다. 여기서 집까지 최단 루트가 어땠더라… 그렇게 걸음을 떼려던 순간.
누군가 거칠게 후루야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생각지 못한 습격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지르던 후루야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공격이 막혔단 사실에 놀라서도, 미간에 총이 겨눠져서도 아니었다.
“…스카,치.”
“너, 뭐야.”
습격자는, 지독히도 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3.
“대체 뭔데 그 얼굴로 여길 얼씬거리는 거지?”
누가 할 소리를…! 반사적으로 대꾸할 뻔한 후루야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가라앉혔다.
히로… 아니, 히로를 사칭하는 타인. 본인일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후루야가 상대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저 얼굴로 어슬렁거릴 놈이라면야 뻔했다. 조직의 누군가겠지. 친구의 본명을 입에 담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설마하니 경시청 근처에서 저 모습으로 어슬렁거리고 있을 줄은… 경시청을 오가는 이들 중 스카치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동기가 모두 죽고 없는 지금으로선 모조리 공안 사람이다. 미끼로 내걸 인물로는 제격이란 사실을 후루야는 부정하지 못 했다. 본인의 속이 뒤집어지는 건 별개였지만 아무튼.
아무리 의도한 걸음이 아니었다한들 경시청 근처에서 수상히 목격된 건 타격이 컸다. 안 그래도 노크로 의심 받은 이력이 있는 마당에 구실을 또 던져주는 꼴이니까. 간부들은 좋아하겠지. 특히나 진이. 그러므로 거기까지 보고가 올라가면 다소 곤란했다. 한숨을 꿀꺽 삼킨 그가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입을 떼려던 찰나.
“모로후시 쨩, 갑자기 무슨-… 어?”
“...저 녀석 설마…”
낯익은 실루엣들.
왜, 왜 저 녀석들까지… 설마, 노리는 건 나였나?
눈 앞이 순간 아찔해졌다. 히로의 정보가 대체 어디서 샌 건지 알 수가 없어 아득해진 것인지, 죽은 소중한 친구들의 모습까지 빌려 자신을 떠보려는 조직의 수완이 소름끼쳐서인지… 태연한 척을 고수하고자 했으나 장담하지 못한 후루야가 혀를 지그시 깨물었다. 간밤의 악몽을 이어 꾸는 기분에 현실감이 자꾸만 달아나려 했다.
아무리 할로윈이라지만 이런 이벤트는 사양인데. 불편한 자세와 겨눠진 총이 도리어 이성을 유지하게 했다. 반갑지 않은 아이러니였다.
“봐, 역시 살아있었잖아! 저 녀석이 어떤 놈인데!”
“모로후시, 설명 좀 해봐.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인기척이 점차 가까워졌다. 총을 겨누고 선 사내에게 가려져 얼굴들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들은 기억 속 친구들의 것과 제법 닮아있었다. 어떻게 알고 재현했을까. 얼굴이야 사진을 보고 변장한다지만 목소리는 영상이나 음성 자료가 남아있어야 할텐데.
그가 자료의 출처를 궁금해하던 사이, 총을 발견했는지 멈칫하는 모습이 시야 한 구석에 잡혔다. 꼴들이 제법 그럴싸해 후루야로선 그저 기가 찼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반장, 수갑 있지?”
“어, 어. 있긴 한데.”
반장. 반장이란 말이지. 그리운 호칭에 울컥 튀어나올 뻔한 본래의 자아를 억누르는 일은 제법 힘겨웠다. 이깟 연극을 보여주는 저의가 대체 뭐야, 후루야가 내심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이 놈 좀 묶어줘.”
“…후루야가, 아닌 거냐?”
“당연하잖아!”
분노에 찬 대답을 돌려준 사내가 뒤를 돌아보는 찰나. 틈이 생겼음을 간파한 후루야가 잽싸게 움직였다. 총을 쥔 사내의 팔을 잡아 비틀어 총을 갈취하곤, 팔을 마저 꺾어 상대의 등 뒤로 보낸 후 바닥에 엎어뜨린다. 바닥에 쓸린 사내의 얼굴에 생채기가 난 듯 보였으나, 변장 마스크가 조금 벗겨졌겠거니 생각한 후루야가 총을 겨눴다. 우위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관자놀이에 겨눠진 총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후루야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원수라도 보는 둣한 눈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코웃음을 치려다 속이 쓰려 실패한 후루야 역시 매섭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역전된 전세에 다른 남자들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그리운 낯들에 서린 적의가 퍽 껄끄러웠으나, 결국은 타인이라 위안하며 묵묵히 감내한 후루야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버본을 연기하기 위함이었다.
“굳이 넷씩이나 변장해가며 나를 떠보는 이유가 뭡니까.”
우선은 목적부터. 만약 후루야 레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기에 찾아온 것이라면 여기서의 대치는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연극 자체가 발을 묶어두기 위한 것일지도. 그는 혹시 모를 저격수를 경계하기로 했다.
속을 떠보기 위한 가벼운 질문이었건만, 뜻밖에도 아래에 깔린 히로를 닮은 사내가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그건 이쪽 대사야. 뭘 믿고 동기들이 모두 모인 이 자리에 그 녀석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소꿉친구의 외양으로 동기 운운하는 꼴에 절로 속이 끓었다. 열이 오른 머리를 식히기 위해 심호흡마저 해야 했던 후루야가 총을 한층 더 세게 쥐었다. 진정하자. 너무 반응해선 안 됐다. 저 말을 듣고 분노할 사람은 후루야 레이였지 버본이 아니니까.
“조직의 정보망도 제법 쓸만하군요. 스카치가 공안이라는 정보만으로 설마 그의 동기들까지 알아내다니.”
“헛소리가 장황하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그래서 지금 해명하는 겁니다. 알아봤을 당시 저기 셋 중 살아있던 건 한 사람 뿐이었고, 이쪽을 전혀 모르는 눈치이길래 굳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마지막 한 명마저 작년에 사망했기에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만. 그러니 정보상으로서의 능력이든, 조직원으로서의 마음가짐이든… 이제 그만 의심하는 게 어떤가요.”
사납게 오가는 공방을 듣고 있던 사내 하나, 그래, 마츠다를 닮은 이가 심드렁히 말을 걸었다.
“이봐 형씨, 여기 멀쩡히 잘 살아있는 사람 냅다 죽여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마츠다, 총 든 사람 앞에서 맨몸으로 건방 떨지 말랬지!”
“아니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못마땅한 낯으로 귀를 후비는 꼬락서니가 퍽 마츠다스러웠다. 몰려드는 그리움을 애써 내리누른 후루야가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저 정도의 연기가 가능할 정도라면… 첩보부인가? 나 하나 잡겠다고 첩보부 서넛을 동원하다니, 이거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후루야는 애써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을 여는 순간 비꼬는 말이 필터 없이 튀어나갈 것만 같았기에.
그런 후루야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던 또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기와라를 닮은 사내였다.
“진페이 쨩 말이 맞긴 하지. 우린 여기 이렇게 잘 살아있잖아? 그러는 본인은 정작 죽은 자를 사칭해 우리 앞에 나타난 주제에 말야.”
“하기와라!”
“반장도 궁금하지 않아? 이제 와서 후루야 쨩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난 저의가 대체 뭔지.”
사내들의 낯이 점차 더 흉흉해지거나 말거나, 본명이 상대 입에서 튀어나왔음을 인지한 후루야가 상황의 심각성을 재조정했다. 제 정체가 밝혀졌다면 이러한 대치는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경시청 근처이니 섣불리 총을 쓰진 않겠지만, 저격이나 약물 등 방법은 많았다. 차라리 달아나는 편이 여러모로 현명하다 판단한 후루야가 몸을 물릴 준비를 했다. 거꾸러뜨린 사내를 인질로 삼기엔 일으키는 과정에서 역으로 당할지 몰랐고, 총을 쓰자니 소음기가 없었다. 그저 물러나는 게 최선임을 후루야는 순순히 인정했다.
달아나려는 기색을 읽었는지, 사내들이 단숨에 자세를 달리 했다. 균형이 깨지면 덤벼들 태세였다. 속으로 혀를 찬 후루야가 우선 움직임을 멈췄다. 미약한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몸싸움에도 일가견이 있는 놈들일 확률이 높았다. 비슷한 판단을 내린 모양인지 상대편도 동작을 멈췄다. 숨 막히는 눈치싸움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저 정도 변장술이면 분명 소탕 때 놓친 베르무트겠지. 제로 녀석 영전에 바칠 선물로는 제격이겠어.”
“저 변장부터 뜯자. 후루야 쨩 괴롭히는 기분이라 영 별로야.”
변장? 의아했으나 상황이 긴박했던 탓에 우선은 넘긴 후루야가 기민하게 상대편의 낌새를 살폈다. 이대로 있다간 당하리란 직감이 들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달아나야 할 판이군, 낭패에 젖은 생각과 함께 그가 발을 뗐다. 발이 지면으로부터 떨어졌다가 다시 내려앉는 아주 짧은 시간. 찰나에 불과할 것이나 모두가 억겁으로 여긴, 기어이 팽팽한 신경전이 추격전으로 변모하려던 한순간.
“잠깐만!”
사내 하나가 다급하게 모두를 멈춰세웠다. 반장이라 불리던, 다테를 닮은 이였다.
“잠깐, 좀 기다려봐.”
“갑자기 왜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야기가 서로 안 맞아. 대화 헛돌고 있는 거 못 느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대화가 헛돌고 있다는 이야기에 의구심을 품은 후루야가 슬쩍 시선을 두었다. 변장이란 단어가 남긴 위화감을 그는 잊지 않았다. 조금만 더 상황을 살펴볼까. 돌아 뛸 작정으로 뗀, 추격전의 시작을 알릴 뻔한 발 한 쪽을 슬그머니 거둬들인 그가 자세를 바로했다. 그 사이 다테 닮은 사내가 다른 셋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후루야 녀석 흉내를 내려는 녀석이 우리한테 존댓말을 쓰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냐.”
“버본은 존댓말을 주로 썼으니까 제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그 정도로 허술한 녀석이 모두의 눈을 피해 여태껏 숨어살 수 있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러고보니…
그럴싸한 이야기에 사내들의 얼굴이 조금씩 미묘해졌다.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후루야만이 초조하게 눈치를 살폈다. 적의가 점차 사그라드는 기색이 하도 노골적이라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물어뜯을 기세였던 아래의 사내조차 조금씩 진정하고 있었다.
“이봐 그 쪽.”
“…뭐지?”
“그쪽이 우리에 대해 아는 거 다 말해봐.”
“하아?”
“확인 절차야. 아까부터 우리가 죽었다고 그러던데, 그 죽음이란 게 어땠는지라도 말해봐.”
“반장!”
“기다려봐. 내 생각이 맞다면… 저 놈, 적이 아니야.”
확신에 찬 얼굴은 쉬이 신뢰를 샀다. 늘 그랬다. 그렇기에 믿고 따랐었지. 입술을 꾹 깨물었던 후루야가 사그러드려는 반발심을 애써 키웠다.
“내가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해야 하지?”
“그럼 이쪽부터 말하지.”
후루야 레이는 3년 전에 죽었어. 모로후시의 눈 앞에서.
“……뭐…?”
사내, 다테의 말에 후루야가 얼어붙었다.
총을 쥔 손등 위, 여전히 붙어있는 유령 스티커가 유독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번쩍였던 빛. 엉뚱한 도착지. 죽었을 친구들.
—망령은 과연 어느 쪽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4.
하기와라 켄지, 7년 전 폭탄을 해체하던 중 폭사.
마츠다 진페이, 하기와라 켄지를 사망케 한 범인의 손에 3년 전 마찬가지로 폭사.
모로후시 히로미츠, 3년 전 범죄 조직에 잠입했다가 노크임을 들켜 순직.
다테 와타루, 잠복 근무 후 졸음 운전 차량에 치여 사망.
“…엉망진창이네.”
다테가 이마를 짚었다. 그 뒤의 마츠다와 하기와라는 기가 찬 얼굴이었고, 깔려있는 모로후시는 반쯤 얼이 빠진 낯이었다. 이 정도까지 다르면 오히려 의심을 하기도 어려웠다.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 그러나 결말만이 다른 이야기. 그 과정에서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미래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현실성 높은 이야기들이었다.
차분히 얘길 듣던 다테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선고했다.
“헛소리 같을 테지만… 아무래도 너와 우리의 세계가 다른 것 같다, 후루야.”
“다르다고…?”
“미리 말해두지만 저승과 이승 그런 거 아니니까. 판타지 소설 같은 데서 종종 언급되는, 그 뭐냐. 수평 세계? 평형 세계? 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네 기억과 우리 쪽 사건들이 전혀 들어맞질 않아.”
“반장, 평행 세계.”
“…그래, 그거.”
세계가 다르단 말에 제일 먼저 떠올린 경우의 수를 단숨에 부정 당한 후루야가 얼빠진 낯을 했다. 단어를 잘못 운운한 다테 덕에 웃음을 터뜨렸던 폭탄처리반 소속 둘이 그런 후루야의 얼굴을 보곤 연이어 낄낄댔다.
너무 웃잖아 너희. 민망함에 얼굴을 살짝 붉힌 다테가 둘을 나무랐다. 그래도 분위기가 조금금 전보다 유해진 건 호재였다. 눈 앞의 친구가 드디어 이야길 들어주려는 모양이었으니까.
“이쪽에서 있었던 일들은 이래.”
7년 전, 몇 차례 방호복을 벗었던 행위가 감사에서 걸린 하기와라는 징계를 받았다. 내용은 감봉 및 재교육. 덕분에 한동안 현장에는 마츠다만 나갔다. 3분이면 충분하다는 말버릇 답게 그의 해체는 늘 신속했고, 원격조작이 이뤄진 날 역시 다를 건 없었다. 덕분에 0.5초를 남겨놓고 아슬아슬 해체에 성공해 위기를 넘겼다.
관람차와 병원에 각각 폭탄이 설치되었던 날. 전날 있었던 플라먀와의 대치 중 손목을 부딪혔던 하기와라는 다음 날, 그러니까 폭탄이 설치된 날이 되어서야 통증을 느꼈다. 마츠다를 위험케 한 폭탄범의 성명이 오늘 도착하리란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던 그는 부상을 숨겼으나… 얼마 안 가 결국 들켰다. 마츠다의 눈썰미를 피해갈 순 없었다. 결국 반차를 내야 했던 하기와라는 밥줄 귀하게 대하란 마츠다의 핀잔에 마지 못해 큰 병원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병원, 앉을 곳을 찾아 헤던 그는 얼결에 월척을 건졌다. 그렇게 마츠다는 살아났다.
“저 둘은 이렇고… 후루야, 그러니까 이곳의 너에 대한 건 우리도 모로후시한테 전해들었어. 그러니…”
“…겨울의 초입이었어.”
모로후시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었다. 불편한 자세와 겨눠진 총구는 여전했으나 이제 더는 화가 나지 않았다. 명예로이 순직한 친구를 모욕하려는 줄 알고 분노했을 뿐, 그게 아니라면 그토록 열을 낼 이유가 없었다. 올라탄 남자가 소꿉친구 본인이라면야 더더욱.
2년 전 12월, 후루야는 경찰청 내 배신자에 의해 노크임이 발각되었다. 인지한 순간 재빨리 도주했으나 하필 가까이에 진이 있었다.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진은 꾸준히 버본을 탐탁치 않아했다. 말단들마저 그 사실을 알만큼 어지간히도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따라서 버본이 노크라는 사실은 곧바로 진에게 들어왔다. 마침 그 당시 진과 함께 있었던 아카이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냥개는 연락을 확인한 순간 기괴하게 입을 찢으며 웃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기뻐한 진이 적극적으로 사냥에 나서는 건 당연했다.
버본을 마뜩잖게 여기던 것과는 별개로 실력은 인정하던 사람 답게, 진은 간부 여럿을 동원해 버본을 몰아넣었다. 그 기대처럼 유능했던 후루야는 본인이 어딘가로 몰리는 중임을 직감했던 모양이다.
합류지점에서 기다리던 카자미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후루야와의 연락이 끊겼다고. 10분 뒤 근처 바닷가 어느 항구의 녹색 창고로 오라는 메시지가 그 직후 도착했다. 문자를 마저 읽은 모로후시는 직감했다. 친구는 생존 대신 정의를 선택했다.
최대한 많은 간부를 유인한 후루야는 몰려온 그들을 제법 작은 밀실에 가둔 채 출입문을 잠갔다. 사방 모든 벽이 두꺼워 총으로도 구멍 하나 낼 수 없고, 수류탄을 던지기엔 내부에 있는 모두가 휘말릴 정도로 작으며, 출입문은 오로지 하나인, 그런 곳.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총알 세에도 후루야는 출입문을 지켰다. 모로후시와 카자미가 다른 부하들과 함께 그곳을 찾을 때까지. 만약 네가 있던 세계의 내가 이런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면, 조직 궤멸 시기가 어긋난 건 이 때문일지도 몰라. 모로후시가 담담히 덧붙였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맞닿은 신체로부터 전해지는 떨림이 어딘가 처절하여… 후루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반장은, 글쎄. 아마 결혼 시기가 앞당겨져서 그런 거 아닐까.”
이야기의 바톤이 다시 다테에게로 돌아왔다. 본인 이야기를 꺼내려니 조금 쑥쓰러워진 다테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직 소탕이란 큰 일을 조금 앞둔 시기, 다테는 급하게 결혼했다. 식은 아직이었으나 법적으론 나탈리와 부부가 되었다. 후루야의 장례식 및 사망신고는 조직을 해치운 후에 이뤄질 예정이었으므로, 후루야의 인적 사항이 말소되기 전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기 위함이었다. 증인란에 적힌 이름과 필체는 오래도록 남을 것이었다. 생전의 그 사내가 아무 기록도 남길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친구들의 다그침도 급한 결혼에 한 몫을 했다. ‘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와 결혼해줘’라니, 이거 사망 플래그잖아!
결혼 반지는 두 사람이 법적으로 맺어진 이후 단 한 번도 다테의 손가락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무심코 흘릴 일이 있을 리가. 하지만 후루야가 말한 날짜에 졸음운전 차량을 마주친 건 사실이었기에, 아마 나비효과 덕에 피해간 게 아닌가 싶다고. 그렇게 말을 맺은 다테가 갈피 잃은 낯을 한 후루야를 바라보았다.
어물어물,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던 후루야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여긴, 그럼…”
“너만이 죽은 세상이야.”
담담히 대꾸한 다테가 권총을 든 후루야의 손을 덥썩 잡았다. 반항할 이유도 기력도 사라진 후루야가 순순히 팔을 내렸다. 이야기에 모순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제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거란 사고에 도달했다. 같은 고민을 하고도 결국은 내가 후루야 레이임을 납득했다는 거구나, 너희는. 그리 생각하니 전의가 완전히 꺾였다.
그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너희라고. 29살이 된, 모두라고.
혹시 꿈을 꾸고 있나. 어젯밤 악몽의 연속인가.
하지만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함께 나이 먹어가는 친구들을 이토록 뚜렷이 그려본 적 있던가. 스스로에게 질문한 후루야가 즉답했다. 아니.
그럼에도 지금 눈 앞에 있는 친구들은 명백히 나이 들어 있었다. 어쩌면 이랬을까, 막연히 상상해봤던 그 언젠가보다 훨씬 더 생생한 모습으로.
끝내 인정하고야 만 후루야가 모로후시의 팔을 놓고 비켜섰다. 바닥에 짓눌려 있던 모로후시가 다테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흙 묻은 모로후시의 옷을 털어주는 다테의 손 옆으로, 어둑한 피부색의 손 하나가 덩달아 옷을 털었다. 주인의 멋쩍음을 역력히 드러내느라 다소 머뭇거리긴 했지만 명백히 다정한 손길이었다. 모로후시가 작게 웃었다.
드디어 가까이에 마주보고 선 다섯이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까지 치열하게 대치한 사이가 단숨에 풀어지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이긴 했다.
어색함 서린 적막을 깨고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모로후시였다. 그는 친구를 여전히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중이었으므로. 장례를 치르기 전 시신을 기워야 했을 정도로 잔혹한 끝을 맞은 친구를…
“…여기로 오기 전엔, 뭐하고 있었어?”
“포와로에서 알바를 했고… 귀가하던 중,이었는데.”
“포와로? 그게 뭔데?”
“모리 탐정 사무소 아래에 있는 카페.”
부드럽진 않지만 비교적 원활한 교류였다. 지켜보던 다른 셋이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리 탐정? 아, 그러고보니 란 학생 아버지가 탐정이랬나?”
“알바라니… 너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저저, 다크서클 내려앉은 것 좀 봐. 판다가 친구하자 하겠네. 컨실러로 지운 눈밑 검은테를 간파한 마츠다가 혀를 찼다.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말리는 놈도 없었냐고.
그 속마음이 꼭 스피커로 틀어둔 것처럼 여실히 들리는 기분이라, 눈밑을 손끝으로 괜히 한번 쓸어본 후루야가 객쩍게 대꾸했다.
“모리 코고로에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어서.”
“그 아저씨한테? 왜?”
“이쪽에선 제법 유명한 탐정이야. 잠자는 코고로라고…”
“신기하네. 우리 쪽은 글쎄, 굳이 꼽으라면 쿠도 군이 종종 신문에 얼굴을 비추는 편이지?”
이런 것도 다른가? 갸웃거리는 친구들을 보며 후루야가 딱딱한 웃음을 지었다. 에도가와 코난, 그 꼬맹이를 의심하고 있던 입장에선 제법 유익한 정보였다.
그래도 지금은 일단 넣어두자. 당장 중요한 건 쿠도 신이치가 아니었다. 먼 훗날에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친구들의 존재가 더 막중했다.
“그러는 너희는, 뭐하는 중이었어?“
“퇴근하고 술 마시러 갈 참이었지.”
“단골 술집이 할로윈이랍시고 특별 메뉴를 판매한다길래, 거기나 가볼까 했거든.”
그러고보니 할로윈이었지, 오늘. 연이은 충격적인 사건들에 잠시 잊고 있었던 후루야가 문득 든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인가?”
“뭐가?”
“우리가 만난 이유 말야. 할로윈이라 그런 건가 싶어서.”
“…후루야 너, 그런 거 믿는 녀석이었냐?”
“그거 말곤 설명할 길이 없잖아.”
뚱한 표정을 짓는 후루야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던 마츠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긴 하지.
“일단 자리를 옮기자. 이러고 있다가 아는 사람 마주치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테니까.”
“가기로 했던 술집은 무리겠네. 제일 만만한 건 역시 우리 중 누군가의 집인데…”
“여기서 제일 가까운 게 누구 집이더라?”
“반장네. 근데 아무래도 반장 집은 무리니까 히로 나리네 집으로 가자.”
갑작스레 빨라진 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후루야가 멍하니 네 친구를 바라보았다. 감회에 젖느라 놓쳤다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반장네 집은 왜 안 되는데?”
“애가 너무 어리니까.”
“애?”
“아까 말했잖아, 결혼했다고.”
“설마하니 신혼여행에서 덜컥 애를 만들어 올 줄이야.”
“조용히 해, 마츠다.”
면박을 주면서도 쑥쓰럽다는 듯 웃는 다테의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그런 친구의 얼굴을 보며 후루야도 웃었다. 그저, 좋았다.
“아무튼, 술이라도 한 잔 하자. 어차피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그냥 넘기기엔 역시 아쉽겠지?”
“하기 녀석이랑 술 사갈게. 반장이랑 히로 나리 둘이 후루야 데리고 먼저 가있어.”
5.
잔을 나눴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창을 가렸다. 내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사람들처럼.
지금이 어제인지 오늘인지, 밤인지 새벽인지. 그런 건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은 다테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아빠가 된 순간 얼마나 울었는지.
오래 연락을 끊은 죄로 형 앞에 꿇어 앉아 혼나던 모로후시가 형의 눈물을 처음 목도하곤 꽁꽁 얼어붙었던 일이라든가.
다테의 아이가 처음 말한 이름은 하기였고, 어찌나 용감한지 마츠다의 높이높이를 유독 좋아한다는 사실도.
그들은 마치 헤어진 적 없는 것처럼 떠들었다. 근황을 나누다 말고 유치하게 투닥거리거나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았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필사적이었다.
꿈 같은 시간이었다. 영영 깨고 싶지 않을 만큼.
그럼에도,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슬픈 기억들로부터 버티게 해준 그 끝이 이번엔 야속하게도 서로를 갈라놓았다. 기어이 동이 트는지 창을 가려둔 커튼이 희미하게 빛났다.
여명이 고하는 끝을 거부하고픈 마음은 산더미 같았으나… 기적은 단호했다. 함께 앉아있던 후루야의 손 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가는 거냐?”
“내 입장에선 너희들이 가는 거야.”
“그것도 그렇네. 네 쪽에선 너 혼자 남았다고 했지.”
“…제로…”
“…괜찮아?”
괜찮아, 버릇처럼 대꾸하려던 후루야가 잠시 멈춰섰다. 그리 가벼이 대답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숨을 한두 번 머금고 뱉은 그가 모두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괜찮을 거야.”
너희가 여전히 그립겠지만. 많이 보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 나를 잃은 너희가 그랬을 것처럼.
그러니…
“너희도… 잘 지내.”
웃으며 안녕.
이곳에 왔을 때처럼 엄청난 빛이 번쩍였다. 잔상처럼 친구들의 얼굴이 눈 앞에 일렁였다. 모두가 한껏 웃고 있었다.
눈을 뜬 후루야의 앞에 멘션이 보였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토록 서둘러 돌아가던 종착지였건만, 어떻게 이리 꼴 보기 싫을 수가. 쓴 웃음을 걸친 후루야가 술냄새 나는 겉옷을 몇 번 펄럭댔다. 여명이 밝은 걸 봐선 이쪽도 비슷하게 시간이 흐른 모양이므로,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연락을 취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던 후루야가 이내 눈치챘다.
“스티커…”
손등에 붙어있던 스티커가 사라져있었다. 통행료로 받아간 건지, 아니면 잠시나마 썼던 유령이란 탈이 벗겨진 건지. 손등을 조심스레 매만지던 후루야가 곧 주먹을 꾹 쥐었다.
꿈은 끝났어.
각오를 다진 그가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카자미? 다음 접선 장소 말인데……
해가 떴다. 새로운 하루를 기꺼이 맞이하며, 그는 남들보다 아주 조금 늦게 31일을 놓아주었다.
안녕.
6.
“좋은 아침이에요, 아즈사 씨.”
“좋은 아침이에요!”
11월 첫날, 포와로의 아침을 함께 열게 된 두 사람이 조금은 피곤한 낯을 한 채 마주 보고 웃었다. 우와, 데자뷰. 아즈사가 중얼거렸다. 드물게 두 사람의 아침 시프트가 겹치는 날이었다.
가게 앞을 쓸고, 커피잔을 데우고, 테이블을 닦고… 혼자 하던 일을 둘이 하니 오픈 준비는 금방 끝났다. 덕분에 생긴 여유 시간, 라떼를 내려 마시던 아즈사가 뻐근한 모양인지 제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아침이 오지 않길 얼마나 빌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젯밤은 유달리 금방 지나가버린 기분이에요.”
“그렇네요. 정말… 정말로요.”
짧은 만남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두 눈을 살풋 감은 후루야가 지난 밤을 천천히 회고했다. 함께 나이를 먹은 너희가 어떤 모습인지를 알았고, 너희가 어느 세계에선 살아있다는 걸 알았다. 어떤 부분은 세월이 바꿔놓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부분도 많다는 걸 알았다. 그 ‘앎’이 그를 행복하게 했다. 최고의 할로윈이었다.
후루야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아즈사로선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뭐랄까… 아무로 씨라면 ‘그래도 해는 뜨니까요’라든가 ‘오늘도 다시 힘내봐요’ 같은 말을 할 줄 알았어요.”
“하하, 저도 사람인 걸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 정도는 분명 있죠.”
“…아무로 씨, 어젯밤에 정말 무슨 일 있었어요?”
“설마요. 그냥 아즈사 씨와 같은 이유죠.”
“아닌 것 같은데… 간밤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싶은 얼굴인 거 알아요?”
“좋은 일…”
0零.
모두의 부름이 문득 귓가를 스쳤다. 작게 웃은 후루야가 이내 대꾸했다.
“꿈을 꿨어요.”
그리운 사람들과 안녕하는, 아주 좋은 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