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행착오
written by. 연화
1.
물에 헹궈진 밥그릇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아내인 나탈리의 것이었다.
지금은 어디쯤 지나고 있으려나. 아침 일찍 나선 아내의 행방을 추측해보던 다테가 다음 그릇을 집어 들었다. 말끔해지는 그릇을 보아도 속이 편치 않은 건… 역시 미안함 때문이려나.
다테가 집을 지키는 시간은 생각보다 적었다. 철야나 연장근무가 잦은 직업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만큼 나탈리의 부담은 커졌다. 모처럼의 주말을 밀린 집안일이나 아이와의 시간을 위해 보내기 바빴다. 미안해하면서도, 어리광이란 걸 알면서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아 줄곧 속이 시끄럽던 참이었다.
모처럼 비번이 돌아온 김에 자유를 주고 싶었다.
다테의 기대대로 나탈리는 기뻐했다. 결혼식 이후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을 볼 수 있겠다며 연락을 돌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정말 괜찮겠냐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다테를 믿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비번 날 잘 쉬다 말고 불려 나간 전적들이 있어서였다.
평일에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나가보면 그만이었지만 오늘은 주말이었다. 베이비시터는 오지 않는 날. 근심이 깊을 만도 했다.
그러나 다테라고 무작정 나탈리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고, 그게 먹혀 겨우 나탈리를 설득해 배웅한 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어째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은 아침의 실랑이가 꼭 먼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다 헹군 그릇의 물기를 한 번 털어내곤 거치대 위에 얹었다. 방금 게 마지막 그릇이었으므로, 설거지 끝. 한결 홀가분해진 다테가 비로소 기지개를 켰다.
물소리가 멎은 자리에 고요가 밀려들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숨소리만이 이따금 정적을 깬다. 새근거리느라 들썩이는 아이의 작은 몸을 보며 웃은 다테가 부엌을 벗어났다.
욕실 앞에 선 다테가 이번엔 세탁물 통을 뒤적거렸다. 흰옷과 검은 옷을 분리하고, 수건은 한 번 삶아야 하니 따로 빼놓고, 손빨래를 해야 할 속옷도 따로 빼고… 입을 벌리고 있는 세탁기 안에 급한 빨래를 차곡차곡 밀어 넣자 금세 내부가 가득 찼다. 거기에 세제 약간, 섬유유연제 적당히. 버튼을 누르면 이제 세탁은 기계의 몫이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세탁기를 미련 없이 등진 다테가 도로 부엌으로 향했다. 정오가 코앞이었다. 배고프다며 일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점심 준비를 해야 했다.
냉장고 안에 뭐가 있더라… 점심 메뉴를 고민하며 부엌으로 향하던 찰나.
식탁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이 벨소리와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모처럼의 비번 날인데 설마. 슬금슬금 밀려오는 직감을 애써 부정해보다, 액정에 크게 뜬 이름을 확인하곤 탄식한다.
메구레 경부. 상사의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다테는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낙관적이라 그렇다기보단 하나의 간절함 같은 것이었다.
꼭 업무 관련이리란 보장은 없잖아? 그냥, 뭘 물어보려고 그런 걸 수도 있고.
그간 휴일에 걸려온 전화 대부분이 호출을 위해서였음을 철저히 무시한 기대였다. 그만큼 아니길 바라는 마음은 컸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다테가 수신 버튼을 누르곤 귀에 갖다 댔다.
“다테입니다.”
[아, 다테 군. 통화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휴일날 미안하구만. 자네와 타카기 군이 수사하고 있던 오피스텔 살인사건 말인데, 결정적인 목격담이 들어왔네. 아무래도 곧장 움직여야 하지 싶어. 혹시 나와줄 수 있겠나?]
왜 슬픈 예감은 매번 빗나가질 않는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 다테가 거실을 내다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꿈나라 한복판이었다.
“나갈 수는 있습니다만… 아내가 밤늦게 들어올 예정이라 아이 돌봐줄 사람을 따로 불러야 해서요. 아이를 맡기고 나서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본청에서 봅세.]
“네.”
전화를 끊은 다테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가는 날이 장날이냐… 아니지, 어쩌다 한번이라기엔 빈도가 높았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표현이 더 걸맞으려나. 실없는 생각으로 허탈함을 무마한 다테가 핸드폰을 고쳐쥐었다. ‘믿는 구석’을 호출하기 위해서였다.
[하기와라입니다.]
“하기와라.”
[반장? 전화를 줬다는 건, 설마…]
“그 설마다.”
[바쁘시네요 형사님.]
“집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냐.”
[차로 30분!]
“과속은 안 된다. 알지?”
[평소엔 나도 나름 모범운전자거든?]
“그 말을 믿느니 우리 애 주차 실력을 믿겠다.”
[붕붕이 잘 끌고 다니나 보네. 선물한 보람이 있는걸?]
“가끔 거기 그대로 앉아 잠들기도 하더라. 누굴 닮아 차를 그리 좋아하는지… 뭐, 사족은 이쯤 하고. 되도록 빨리 와줬으면 좋겠는데.”
[접수~]
전화를 끊은 다테의 움직임이 한결 신속해졌다. 하기와라가 도착하기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
“압빠…”
“응,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금방 점심 만들어줄게.”
아이 점심 챙겨주기,라든가.
2.
운전석에 앉은 하기와라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단체 채팅방에 말을 남겨볼 심산이었다.
물론, 정말로, 혼자서도 충분하겠지만. 만약이란 게 있지 않은가. 혼자보단 여럿이 즐겁기도 하고.
[나랑 반장네 애기 보러 갈 동료 모집~]
[선착순 4명!]
글을 남기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동 속도와 횟수로 봐선 한두 명 답장한 게 아닌 듯 했다.
시동을 켜려다 말고 당황한 하기와라가 핸드폰을 도로 집어들었다. 뭐야, 이 녀석들 다 지금 여유로운가? 뭐, 나쁠 건 없었다. 여유롭다는 건 그만큼 올 확률이 높다는 소리니까.
諸伏[갑자기?]
降谷[그보다 선착순 내건 의미가 전혀 없잖아]
松田[나 오전 잠복 끝나면 퇴근이라 가능]
降谷[나도 오늘은 포와로 오전 알바 뿐이라 가능해]
오. 마츠다는 상정 내였지만 후루야는 월척이었다. 콧노래를 부른 하기와라가 손가락을 놀렸다. 아직 답하지 않은 한 사람을 재촉하기 위함이었다.
[모로후시쨩은?]
諸伏[난 지금부터도 가능해]
松田[히로 나리가 제일 여유롭구만]
諸伏[근데 이렇게 갑자기 가도 돼? 오늘 주말이잖아.]
降谷[하기와라, 네 말썽에 우릴 엮으려는 건 아니겠지?]
거 참 너무하네.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나를 의심해?
함께한 시절이 있으니 하는 정당한 걱정이었으나 하기와라는 당당했다. 그래도 찔리는 바가 아예 없지는 않았으므로, 한 마디를 덧붙여주기로 했다.
[반장의 부탁이야]
降谷[반장이? 무슨 일 있어?]
태도 전환이 너무 신속한거 아냐?
松田[호출 들어왔나보지]
班長[정답이다 마츠다]
松田[제보 전화 들어왔다더니 반장이 맡은 건인가 보네]
降谷[애기 본다는 게 see가 아니고 care였냐고]
그런거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정보를 고의로 누락했을 뿐. 키득키득 웃은 하기와라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운전 중 핸드폰 사용은 금지. 그러니 이제부터 올 연락들은 주차를 마치고 나서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전혀 문제될 건 없었다.
어차피 다들 올테니까.
3.
“다들 생각보다 빨랐네?”
“네가 늦은 거야.”
“부지런히 오지 그랬냐.”
“어서와, 하기와라.”
유일하게 반겨주는 모로후시에게 우는 소리를 하며, 차문을 잠근 하기와라가 재빨리 합류했다.
하기와라의 예상대로 안 온 사람은 없었다. 모처럼 한데 모일 기회임을 직감한 거겠지. 반가우면 그냥 반갑다고 할 것이지 꼭 저렇게 표현들을 해요 아주. 청개구리 둘을 가볍게 흘겨본 하기와라가 선두에 섰다. 명분을 쥔 이의 당당한 발걸음이라고나 할까.
똑똑. 눈에 익은 문을 가볍게 두들긴다. 멀쩡히 달려있는 초인종 대신 노크를 하게 된 건 아이로 인해 생긴 습관이었다. 초인종 소리에도 아이는 놀라 울 수 있다는 걸 경험하고선 얼마나 당황했던지. 그 기억이 하도 선명한 탓일까, 아이가 많이 자랐다는 걸 알면서도 초인종엔 좀처럼 손이 가질 않았다.
같은 기억을 떠올리곤 다 함께 웃던 사이 현관문이 열렸다. 미안, 사과하는 다테의 품에는 아이가 안겨있었다.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로.
“뭐야, 애기 왜 울어. 누가 울렸어.”
“알고 있어서 그래. 내가 이 외투 입으면 외출한다는 거.”
쓰게 웃으며 대꾸한 다테가 안으며 몸을 물렸다. 문고리 근처에 서있던 후루야가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땡큐, 인사한 하기와라를 필두로 동기 넷 모두가 집안에 들어섰다. 좁지 않은 현관 앞이 순식간에 꽉 들어찼다. 우선 거실로 가자며 안내한 다테가 아이를 추슬러 안았다. 훌쩍이는 소리가 품에서 들려올 때마다 등을 토닥이기 바빠보였다.
“바로 가봐야 하는거지?”
“어. 다들 고맙다.”
“평소엔 우리가 신세지는데 뭘.”
“그나저나 괜찮은 거 맞아? 계속 훌쩍이고 있잖아.”
“다 설명했고 이해도 받았어. 그냥 서운해서 그런 거니까 니들이 잘 놀아주면 돼. 아침마다 울면서 보육원 가놓곤 제일 잘 놀다 오는 애니까 괜찮을거야.”
그치? 넌지시 물은 다테가 엄지로 눈물을 닦아냈다. 안 그래도 멎어가는 중이었는지 금방 울음이 걷혔다. 대신 볼이 빵빵히 부풀기 시작했다.
심술주머니 또 부푸는 것 좀 봐. 중얼거린 마츠다가 한 손으로 볼을 꾹 눌렀다. 푸우, 별난 소리와 함께 빵빵하던 볼이 순식간에 쭈그러들었다.
“하지마!”
“꼬맹이 네가 심술 안 부리면 삼촌도 안 이러지.”
“…아빠아!”
도무지 못 이기겠다 싶었는지, 결국 아이가 다테에게 매달려 심통을 부렸다. 귀여워 죽으려는 삼촌들은 안중에도 없이 아빠 외투만 꼭 쥔 채 보채기를 몇 번. 결국 다테의 설득에 넘어가준 아이가 손에 힘을 풀었다. 맘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수긍하겠다는 나름의 표시였다.
때를 놓치지 않은 모로후시가 아이를 받아 안았다. 따끈한 온기가 떠난 품이 못내 아쉬운 다테였으나, 이젠 정말 나가봐야 할 시간이었다. 몇 번이고 돌아보던 오늘 아침의 나탈리 속을 알 것도 같아져 조금 씁쓸해진다.
“…다들 부탁한다.”
“걱정 말고 얼른 가봐.”
“아, 잠시만. 혹시 주의해야 하거나 알아둬야 하는 거 있어?”
“눈에서 떼면 안 된다는 건 알지?”
“당연하지.”
“간식 줄 거면 2시에서 4시 사이에 소량만. 많이 주면 저녁 안 먹으니까.”
“알았어.”
“점심 먹은 거 설거지랑, 세탁기 다 돌아가면 건조대에 좀 널어주라.”
“…설거지야 괜찮지만, 세탁물은…”
“옷들 뿐이야. 우려하는 상황 없을거다.”
“아, 그럼 오케이.”
유능한 사람들답게 인수인계는 금방 끝났다. 사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덕에 주의할 일이 크게 줄어든 덕이 컸지만.
이제 떠날 일만 남았는데… 떠날 생각이 없어보이는 다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두가 이내 쓰게 웃었다.
“반장, 안 가?”
“가야지. 가야하는데…”
“얼른 가라.”
“애기야, 우리 아빠 다녀오세요 하자.”
“다녀오떼요…”
아직 미흡한 시옷 발음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못내 뗀 다테가 일터로 향했다. 괜찮겠지…? 믿음과 불신 사이 줄을 타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현관문이 느리게 닫혔다. 일터로 떠나는 가장의 뒷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모두가 비로소 입을 뗐다.
"...갔네."
"그러게."
언제 봐도 참 든든한 등이야. 오늘은 어쩐지 더 그렇긴 한데.
괜스레 코밑을 훔친 하기와라가 박수 두 번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자, 역할을 나눠보자.”
“아이 돌볼 사람이랑 세탁기에서 빨래 꺼내 널어둘 사람 정도면 되나?”
“나 아이 간식 만들려고 재료 사왔는데.”
“지독하다 후루야… 그냥 만들어진 거 사오지 그랬냐.”
“아이 입에 들어가는 거잖아.”
“그럼 이왕 부엌 가는 거 네가 설거지까지 해라.”
“빨래 꺼낼 곳 청소기 한 번 돌리는 게 낫지 않아?”
하루이틀 합을 맞춰본 게 아닌지라 결론은 금세 났다. 붙임성 좋고 서글서글한 하기와라가 아이 돌보기 담당. 후루야는 설거지와 간식 만들기. 청소기 돌리고 정리하는 건 마츠다. 다 돌아간 세탁기 속 빨래는 모로후시가 맡기로 했다.
반나절 넘게 아이를 전담해본 적이 없는 삼촌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이 자리에 다테가 있었다면 아이 돌보기 담당에만 셋을 붙여줬을 거란 사실도.
그렇게 삼촌들은 이론과 의욕만을 안은 채 육아라는 세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4.
“미용실 놀이?”
“응!”
그러고보니 며칠 전 미용실에 다녀왔댔지… 단체 채팅방에 다테가 올려줬던 사진이 하기와라의 뇌리를 스쳤다.
얌전하고 좋네. 하기와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아이가 가위를 가져오겠다며 일어났다. 가위라고 해봐야 뭐, 의사놀이 세트 같은 데에 든 장난감 가위 정도겠지. 날붙이 같은 위험한 물건들은 진작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들에 감춰두었다. 물론 삼촌들이 아니라 부모가.
태평하게 거실 한복판에 자리 잡고 앉은 하기와라가 아이의 행방을 눈으로 쫓았다. 놀이방에 가선 여기저기 뒤적거리는 걸 보니 아마 예상이 맞지 싶다. 놀이세트는 반대편에 있을텐데… 알려줘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아이가 무언가를 안아들었다. 저거 색종이나 스케치북이 들어있는 통 아닌가? 의아해하는 하기와라를 알 리 없는 아이가 한참 그 통을 뒤적거렸다. 바닥에 흩뿌려지는 색종이를 난감하게 바라보던 하기와라가 슬쩍 입을 열었다.
“삼촌이 찾는 거 도와줄까요?”
“아니!”
거절당했다… 어쩐지 서운해진 하기와라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 콩알만 한 게 언제 저렇게 커가지고… 나중엔 삼촌 얼굴도 보기 싫다고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서운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상상들을 이어가는 사이, 드디어 원하던 걸 찾았는지 아이의 표정이 환해졌다. 오른손에 물건을 쥐곤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탐톤! 앉아!”
“삼촌 머리 해줄거야?”
피식 웃은 하기와라가 순순히 등을 보이고 앉았다. 바로 뒤에 선 아이의 움직임을 가늠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조그마한 손이 하기와라의 머리칼을 조금 움켜쥐었다.
오, 뭔가 그럴싸한데? 감탄하는 사이 찾아온 물건인지 뭔지를 머리칼에 갖다대는 아이가 보였다. 빛을 받으면 번쩍이고, 날이 서있고, 손아귀를 벌리면 함께 입이 벌어지는……
“잠깐만, 진짜 가위잖아?!”
기겁한 하기와라가 재빨리 머리를 앞으로 뺐다. 한 박자 느리게 허공을 자르는 가위를 보며 식겁하기도 잠시, 영문을 몰라 갸웃거리고 있는 아이에게서 가위를 뺏아들었다.
요즘 애들이 쓰는 가위는 꼭 장난감처럼 나오는구나… 색종이 오릴 때 쓴 걸 깜빡하게 못 올려둔건가.
그래도 다치거나 머리를 잘리지 않아서 다행-
“그거 주떼요.”
아.
“애기야, 이거 위험한 거예요. 잘못하면 아야할 수도 있어.”
“주떼요.”
“아니, 이건 ‘주세요’ 해도 못 주는 거라…”
“줘! 주라고! 흐어어엉!!”
이런…
똥고집 스위치가 켜진 걸 직감한 하기와라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아무래도 한참 실랑이를 해야 하지 싶다.
5.
“진페이 쨩… 살려줘…”
“뭐야, 벌써 뻗은 거야? 머리는 왜 또 그 모양이야.”
청소기 코드를 빼던 마츠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소파에 널부러진 하기와라는 어디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1시간 가까이 이어진 미용실 놀이 끝에 하기와라의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그 우여곡절을 알 리 없는 마츠다로선 그저 거지꼴이 따로 없단 생각 뿐이었지만.
아이는 뭘하나 싶어 돌아보니, 스케치북에다 스티커를 붙이며 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주 얌전하게.
“알아서 잘 놀고 있잖냐.”
“그게 아니래도…”
진페이 쨩은 속고 있어…
하기와라의 중얼거림을 코웃음치며 넘긴 마츠다가 아이 앞에 앉았다.
“하기 삼촌이 나이를 먹긴 했나보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뭐 어쨌거나 쉬고 있어. 애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살았다…”
그대로 엎어지는 하기와라를 무시한 마츠다가 아이 옆에 놓인 스티커 판을 집어들었다. 이상한 펭귄, 소시지 모양 원숭이, 눈 달린 자동차… 오, 자동차는 좀 흥미롭네. 하나를 떼어내 스케치북 빈 공간에 붙이자 아이가 꺄르르 웃었다.
이게 뭐 어렵다고… 하여간 하기 저 녀석은 겉만 번드르르하다니까. 실속이 없어요 실속이. 험담 아닌 험담을 하며 킬킬댄 마츠다가 태평하게 생각했다.
하기와 노느라 아이도 좀 지쳐있을 테니, 조금만 놀아주면 자든 배고파하든 하겠지? 그 때까지만 어울려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아니었다.
“탐톤, 또!”
“또…?”
아니, 왜 안 지치는건데!
속으로 울분을 터뜨린 마츠다가 쫓아오는 아이를 피해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난 쫓는 편이지 쫓기는 편이 아닌데…! 아니지,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더라.
시작은 그래, 술래잡기를 하자던 아이의 제안이었다. 쫓는 사람이 쫓기는 사람 몸에 스티커를 붙이면 잡힌다나 어쩐다나.
형사인 이상 술래잡기는 일상이었다. 범인이 쫓기는 사람이고 형사가 술래라면 뭐, 추적하는 과정을 술래잡기라고 불러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런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만만했더란다. 반장네 애 답네, 뭐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윗옷에 스티커가 한 주먹 붙어있더라.
“잡았따!”
“그래, 잡혔다… 그러니 이번엔 삼촌이 술래를-”
“탐톤, 또!”
“이거 술래잡기 맞는거냐…?”
술래잡기란 건 원래 돌아가면서 술래 하는 거 아니야?
게임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쫓아본 적이 없는 마츠다가 마른 세수를 했다. 이쯤 되니 그냥 범인을 쫓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두손 두발 다 드는 심정으로 하기와라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이젠 그만. 진짜 그만. 스티커를 어디에 얼마나 붙이든 상관 없으니 그냥 내버려둬주라…
그런 마츠다의 속을 알 리 없는 아이는 그저 해맑게 뒤쫓아올 뿐이었다. 잡았다, 외치며 얼굴에 스티커를 붙이기 바쁜 아이가 이젠 두렵기까지 했다.
놀아주는 사람이 바뀌면 아이의 체력도 원상복구 된다는 걸 모른 마츠다의 완벽한 패배였다.
6.
“탐톤.”
“응? 어라, 하기 삼촌이랑 마츠다 삼촌은?”
“자.”
“잔다고…?”
당황한 모로후시가 거실을 내다보았다. 세탁실에선 두 사람의 다리 정도만 보였으나, 대충 어떤 자세로 어쩌고 있는지는 알 것도 같아 그저 당혹스러웠다. 애를 두고 잠들 녀석들이 아닌데…? 꺼낸 세탁물을 바구니에 모두 넣은 모로후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봐야지 안 되겠다.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곤 앞장서는 아이를 따라 작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다.
거실로 나오면, 역시나. 두 사람 모두 소파 근처에 널부러져 있었다.
“하기와라, 마츠다.”
“어서와 모로후시 쨩… 진페이 쨩이 반응을 안 해줘서 그리 갔나보네.”
“시끄러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통을 내려둔 모로후시가 두 친구를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다크서클이 언뜻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좀비 같다는 말을 대놓고 내뱉지 않은 건 모로후시 나름의 배려였다.
“아이 체력이… 장난이 아니야.”
“그렇다곤 들었는데…”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기 바빠보이는 아이를 돌아보며 모로후시가 갸웃거렸다. 저렇게 얌전한데 정말 무슨 일이지. 의아해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마츠다는 직감했다. 저 녀석도 속고 있군. 하기와라도 생각했다. 얼마 가지 않아 모로후시 쨩도 우리 옆에 누워있겠네.
예상은 멋지게 적중했다.
아이는 열정적인 창작자였다. 심지어 창의적이기까지 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모든 곳을 도화지 삼을 줄 아는 화가라는 뜻이었다.
빨래를 널기는 개뿔, 모로후시는 바닥이나 벽에 낙서하려는 아이를 막아서느라 바빴다. 심지어는 옷들에도 낙서를 하려는 통에 결국 크레파스를 빼앗아야 했다.
그렇게 빼앗았다간… 다음에 벌어질 일을 이미 경험해 본 바 있는 하기와라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힘내, 모로후시 쨩… 대신 빨래는 내가 널어둘게…
한편,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혼이 쏙 빠진 모로후시는 어렵지 않게 두 친구의 좀비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얼핏 들린 울음소리는 환청이 아니었구나… 그래도 크레파스는 빼앗았으니, 이젠 좀 쉴 수 있겠지 생각했더란다.
아니었다.
아이는 사인펜을 쥐고 돌아왔다. 그토록 울며 씨름할 땐 언제고, 이렇게 쉽게 갈아타도 되는거니… 허탈하다 못해 헛웃음이 났다. 이럴거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린건지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뭐, 아이의 변덕에 이유가 있겠냐마는.
새 도구를 장착한 아이의 창작욕이 다시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가 선택한 새 도화지는 모로후시의 얼굴과 몸이었다.
아니야, 차라리 이게 낫다… 내어줄 테니까 제발 여기 가만히 있어주라…
몇 십분 전 마츠다가 빌었던 것과 비슷한 부탁을 주워섬기며, 모든 걸 포기한 모로후시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뒤는 제로에게 맡기자. 미안하다 후루야… 아무래도 이 이상은…
7.
“히로, 저거 맛 좀… 뭐야, 다들 꼴들이 왜 그래”
몇 시간만에 부엌에서 나온 후루야가 얼빠진 얼굴로 친구들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칼이 헤집어진 정도에서 그친 하기와라야 그렇다 쳐도, 저게 얼굴인지 스티커판인지 모를 지경인 마츠다나 낙서투성이인 히로는 도대체…
“왔냐.”
“마지막 희생양이네.”
“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뒤는 맡길게 제로…”
뭔가를 더 묻기도 전 아래서 누군가 바지를 잡아당겼다. 시선을 내리자, 가위 모양의 플라스틱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돌고 돌아 다시 그거냐… 중얼거리는 하기와라의 말에 의아해하기도 잠시, 일어날 생각들이 없어보이는 친구들을 대신해 후루야가 아이 앞에 앉았다.
"토꿉노리!"
"어... 그러니까, 소꿉놀이 말이지?"
"네!"
다행히 한 번에 맞췄다... 안도의 숨을 내쉰 후루야가 아이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건 그렇고 소꿉놀이라니, 뭘 해줘야 하는거지?
소꿉놀이라곤 해본 적 없는 후루야가 잠시 고뇌에 빠졌다. 그러니까, 장난감을 가지고 하는 놀이를 보통 소꿉놀이라고 하지…? 거기다 종종 역할을 부여받기도 하고.
어라, 그거 공안일이랑 비슷한 거 아닌가. 장난감(권총)을 가지고 하는 놀이(거래). 역할(버본)을 부여받기도 하는.
음, 그럼 간단하지. 금세 여유를 되찾은 후루야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주 큰 착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바로잡아 줄 사람은 없었다.
"딱뚝!"
"싹뚝…? 아,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머리를 잘랐다고 했지. 머리 예쁘다.“
"응! 탐톤도 머리! 예뻐!“
"고마워. 삼촌 머리 잘라줄거야?"
순순히 머리를 내어준 후루야는 알지 못했다. 진짜 가위 대신 그 가위를 쥐여주기까지 하기와라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이 소꿉놀이가 미용사 흉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윽, 엄마, 조금만 살살해주시면-”
“이거! 딸기!”
“응, 딸기모양 머리끈, 아악!”
소리에 놀라 아귀 힘을 뺀 아이의 손에는 금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쥐여져 있었다. 이래서 하기와라 머리칼이 저 모양이었던건가…! 한발 느리게 깨달았으나 이미 늦었다. 아이는 아침이면 제 머리를 묶어주곤 하는 엄마 흉내를 내는 일에 심취해있었다.
“가만히 이써야지~”
“아파서 그래요 엄, 윽!”
이 정도도 못 참으면서 잘도 공안을 하는군, 그런 반성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아이의 아귀 힘은 굉장했고, 빗질은 더욱 굉장했으며, 묶는 솜씨는 환상적이었다. 아픔을 참는 일에 도가 튼 공안이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반장, 얼른 돌아와ㅈ, 아야.
8.
“하아…”
뻐근한 어깨를 붙들고 주무르길 몇 번. 해소되지 않는 찌뿌둥함에 한숨을 내쉰 다테가 무거운 몸으로 주차를 마쳤다. 어째 평소보다 더 피곤한 기분이었다. 업무 강도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음을 고려하면 역시 마음가짐의 차이 탓인가.
감사의 표시로 사온 도넛과 케이크 박스를 꺼내든 다테가 뒷좌석 문을 닫았다. 삐빅, 차문이 잠기는 소리를 확인하곤 걸음을 뗀다.
“다녀왔어.”
신발을 벗던 다테가 우당탕탕 발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한쪽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기가 무섭게 아이가 현관으로 튀어나왔다.
“아빠!”
“잘 놀고 있었어?”
두 팔을 벌려보이는 아이를 반사적으로 안아든 다테가 물었다. 대답을 듣지도 않았건만 표정에서부터 티가 났다. 딱 봐도 행복보이는 얼굴. 웅얼웅얼 재잘대는 게 퍽 즐거웠나보다 싶었다.
“어라, 그러고보니 삼촌들은?”
“쩌어기!”
아이의 손가락 끝은 거실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 준비를 하고 있나? 그래도 아이 혼자 나오게 둘 녀석들이 아닌데.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보니 지나치게 조용한 것 같기도 하고…
천천히 거실 문턱까지 걸어들어온 다테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파와 바닥을 가리지 않고 누워있는 모습도 충분히 놀랍긴 했다만, 일단 몰골부터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산발이 된 머리에 머리핀까지 꼽고 있는 하기와라.
여기저기 스티커에게 점령 당한 마츠다.
얼굴도 옷도 사인펜 낙서 투성이인 모로후시.
엉망이다 싶을 만큼 어설픈 사과머리를 한 후루야.
솜씨와 재료를 보고 범인을 알아차린 다테가 어렵사리 입을 떼 물었다.
“삼촌들 누가 저렇게 꾸며줬어…?”
“나아!”
“그래, 그렇겠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답에 다테가 남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품에 안겨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아이와는 다소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뿌듯해보이기까지 하는 아이에게 차마 쓴 소리를 한 수는 없었던지라, 결국 딱딱한 칭찬을 슬쩍 건넨 다테가 애써 신음을 삼켰다.
어디서부터 수습을 해야 하나… 일단 먹을만한 걸 만들어두긴 한 모양이니, 저걸 데우는 동안 이 녀석들부터 깨우고…
생각을 정리하다 말고 친구들을 다시 한 번 들여다 본 다테가 결국 웃음을 흘렸다. 시작은 기가 차 흘린 헛웃음이었으나 점차 유쾌한 웃음으로 번져나갔다.
하도 웃은 탓에 아파오는 배를 무시하곤 핸드폰을 든다. 플래시 소리를 최대한 줄여서… 찰칵, 사진을 찍곤 잘 나왔는지 확인도 한다. 만족스런 결과물을 확인한 다테가 개구지게 웃었다.
아빠가 웃으니 나도 좋아! 함께 꺄르르 웃은 아이가 두 팔을 번쩍 들어보였다. 올라오는 흥을 주체하지 못할 때면 종종 보여주는 ‘만세’였다.
이리 소란스러운데도 안 깨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시달린 듯 싶었다. 이젠 제법 불쌍해보일 지경이었다. 찰칵, 그래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니까. 안쓰러이 여기면서도 사진을 찍는 손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나탈리와 사토에게 보여줘야지. 카자미에게도 보내줄까. 차곡차곡 쌓인 갤러리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은 다테가 모두를 깨우기 시작했다.
다들 일어나! 저녁 먹자!
나름대로 평화로운 한 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