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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
written by. 경동조과거날조인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에 피부는 잔뜩 열이 올라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식은땀이 비실비실 흘러나오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제복 소매에 목 언저리 즈음부터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기분이 들어 괜시리 손부채질만 여럿 해대며 신경질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운 기운에 멍하니 굴러가는 눈동자만 대여섯개는 본 것 같다. 어떻게든 잠을 이겨내보겠다며 두 눈을 부릅 뜬 채 열심히 펜을 움직여대는 손들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는 유일한 소리였다. 고장난 에어컨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마다 후덥지근하기만 한 오후 기온에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간간히 대화를 주고받는 다른 경찰들의 고즈넉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이렇게 더운 날인데도 졸음이 쏟아지다니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 더위를 먹은 탓에 이상해져가고 있다거나. 찰칵, 소리와 함께 볼펜 윗부분이 튀어 올라왔다. 풋풋한 여름의 공기, 무겁게도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열기 사이로 느껴지는 옅은 바람을 폐 속 깊숙히 들이마시고 문득 돌아본 창 밖 너머에는 매미소리만 따갑게 귀를 울리는 커다란 고목이 하나 서 있었다.

 

 

'아직도 있었구나, 저거.'

 

 

어렸을 때 잠깐 지냈던 동네 파출소에 발령받은 건 우연이었다. 분명 히로가 도쿄에 올라온지 1년이 지나가던 해, 여름방학을 맞아 친척의 권유로 히로와 함께 놀러왔었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발령지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서로를 불렀던 게 눈에 선했다. 반장과 히로, 그 두 사람과 같은 파출소에 배정받은 건 행운이었다. 일본에 파출소는 많았고 경찰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도 같은 곳에 배정될 확률은 그만큼 적었으니. 게다가 마츠다와 하기와라는 폭탄 처리반으로, 다테는 형사반으로, 서로 원하는 부서가 달랐던 만큼 이젠 뿔뿔히 흩어질 거라 생각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마츠다와 하기와라까지 서로 같은 파출소에서 근무하게 됐다고 했다. 우연한 행운에 기뻐하기도, 장난삼아 질렸다는 듯 툴툴거리기도 했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후루야, 모로후시. 교대하러 가자.“

 

"그래."

 

 

퍽 즐거웠던 기억에 괜시리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 더위에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에 빠져있었던 게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몸을 일으키는 게 가볍고 경쾌했다. 반장을 따라 문턱을 나서며 순찰하고 돌아온 동료 경찰들에게 고생하셨다는 짧은 수고 인사를 곁들이는 것도 잠시, 스쳐간 경찰들이 왜 그렇게 지쳐 녹아내린 마쉬멜로우처럼 흐물흐물해졌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햇빛이 머리 위로 사정없이 떨어져내렸다. 어렸을 때는 이렇게까지 덥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히려 방금까지 앉아있었던 실내가 시원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열감이 피어오르는 거리에 잔뜩 숨을 들이키고 습관적으로 히로미츠를 살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자주 고생하곤 했으니.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달아오른 피부에 걱정스러운 눈으로 히로미츠를 바라보자 괜찮다는 듯 지어보인 미소가 돌아왔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자, 모로후시.“

 

"응?“

 

"해가 뜨거우니까. 좀 답답해도 훨씬 나을 거야. 자, 후루야도.“

 

"고마워, 반장."

 

 

다테 눈에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는지 금세 히로미츠 머리 위로 캡모자가 내려앉았다. 당황스러운 눈으로 다테를 올려다보던 히로미츠도 확실히 그늘이 생기니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는지 모자를 고쳐쓰며 짤막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발령받은 파출소가 있는 곳은 작은 시골인 탓에 순찰은 도보나 자전거로 한다는 게 암묵적 규칙이었다. 피부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를 수준의 땡볕을 뚫고 걷느냐 이 거대한 찜기같은 공기를 뚫고 달리느냐 정도의 상황이어도 변함은 없었다. 일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마을 구경을 겸해 걸어서 순찰을 나간 이후부터 셋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자전거는 오랜만이네.“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인데.“

 

"대학은 아무래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땅을 박차고 자전거 패달을 힘있게 밟으며 나아가자 체인이 감기는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겹치듯 들려왔다. 처음에는 뜨거운 공기가 숨을 덮쳐도 한참을 달리다보면 이마저도 부드러운 바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니 처음 파출소를 나섰을 때보다는 훨씬 나은 기분으로 마을을 돌아볼 수 있었다. 대충 둘러보면 어디에나 있는 흔한 깡촌처럼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군데군데 아름다운 면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마을 이곳저곳을 쏘아다니며 평화로운 풍경을 눈에 담으려 노력했었다. 비좁은 골목 수준의 길을 자전거 셋이 연이어 지나가는데도 사람이 적은 편이라 통행에 큰 지장이 있진 않았다. 방학이 되면 부모님을 따라 내려온 어린 아이들이 종종 보이곤 했지만 이 정도의 폭염에 아이를 밖으로 내보낼 일은 거의 없을테니. 굽이치는 길목을 따라 안쪽으로 내려가니 드문드문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 주민들은 경찰들과도 가까운 사이인지라 순찰이 아니더라도 마주치면 늘 푸근한 인사와 함께 간식거리나 작은 선물같은 걸 챙겨주곤 했다. 같은 마을에서 지내면 가족같은 셈이라고. 어렸을 때 언젠가 들었던 말이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끼리만 뭉쳐있는 건 아니라서, 외지인에게도 선뜻 호의를 베풀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겉모습이 다르다고 신기한 걸 구경하듯 바라보거나, 장난삼아 말을 거는 일은 전혀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종이와 펜을 내주는 게 당연하고, 마땅한 게 없으면 땅에 나뭇가지라도 써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다. 어린 마음에는 그게 늘 신기했다. 그래서 방학마다 이곳을 자주 찾은 걸지도 모르지.

 

 

"젊은이들, 순찰 가는 건가?“

 

"아, 네."

 

"고생이 많네, 날이 더우니 쉬엄쉬엄 하고. 아무 집이나 두드리면 다들 차 한 잔은 내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어르신도 더위 조심하세요."

 

 

느즈막히 안부 인사를 주고 받으며 달리기를 몇 번, 주택가에 다다르자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특히 길이 좁은데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도 하고, 가끔 차가 들어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걷는 편이 훨씬 수월하게 마을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 달리진 않았지만 무더운 날씨 탓에 가져온 얼음물을 주고 받으며 목을 축였다. 분명 꽁꽁 얼어있었던 것 같은데 물에 가벼이 얼음을 띄워둔 모양새가 될 정도로 녹은 게 새삼 해가 뜨겁구나 싶었다. 자박자박 흙길을 즈려밟는 소리와 함께 생수병이 앞뒤로 가볍게 흔들렸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물을 뿌려놓은 건지 길목 군데군데에 물웅덩이와 함께 짙은 색 얼룩이 져 있었다. 얼룩 옆에 희미한 바퀴 자국이 길게 이어져있는 게 땅이 마르기 전에 차가 길을 지나가다 물이 튄 것이라 생각하며 더욱 걸음을 조심했다. 나무 그늘을 빌어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나 문가를 지날 때면 들려오는 풍경이 울리는 소리, 창가 가까이에서 새어나오는 자그마한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금세 파출소에서 바라봤던 고목 아래까지 다다랐다. 오래 전부터 마을 한가운데를 지켜왔던 나무인지라 마을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깊었다. 나무를 따라 둥글게 벤치가 둘러져 있고 근처에는 경로당과 정자가 있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뭔가 소란스럽네.“

 

"차가 있는데, 누가 온 거 아닐까?"

 

 

나무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지는 길목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어딘가 어수선한 공기에 주위를 살펴보니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촌장님 댁 앞에 삐딱하게 세워진 경차가 눈에 들어왔다. 바퀴자국이 이어지는 걸 보아하니 오면서 봤던 흔적의 주인이겠구나 싶어 흘긋 차량 번호판에 눈을 돌렸다. ...렌트카? 마을에 들어오는 차들은 대부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이거나, 가족을 보러 내려온 이들의 것인데다 이곳은 관광지로 유명한 곳도 아니었던지라 의아한 마음에 조금 오랫동안 차량을 바라보고 있자 마침 근처를 거닐던 마을 어르신께서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이거, 요 앞 파출소에서 일하는 청년들 아닌가.“

 

"안녕하세요."

 

"순찰인가? 열심히구먼. 날도 더우니 안쪽에서 쉬었다 가, 마침 손님도 온 것 같으니.“

 

"아하하, 괜찮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일하는 중이라서요."

 

 

부드러운 인삿말과 호쾌한 웃음소리는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의 거절을 담기 좋았다. 히로와 반장의 특기였다. 그저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것처럼 자연스레 흘러가는 대화를 타고 품고 있던 궁금증을 풀어놓기에도 알맞았기에 후루야는 계속 신경쓰이던 것에 대한 질문의 첫 운을 뗐다.

 

 

"저, 손님이라면..."

 

"지나가다 만난 청년들이라는데, 요 앞 감나무 댁 알지? 촌장님이랑 잠깐 일 보러 다녀오는 길에 경운기가 고장나서 쩔쩔매고 있던 걸 고쳐줬다 하더만."

 

"그랬구나, 다행이네요."

 

"그렇지, 아니었으면 웬종일 기다리거나 청년들 불러다 몸만 오던가 했을테니까. 그래서 답례라고 하긴 뭐하지만 쉬었다 가라 불러서 지금 저래 모여있는 걸세."

 

 

경운기, 라는 말에 의문이 깊어져 어르신의 대답에 곧바로 반응하지 못한 걸 히로미츠가 부드럽게 받아냈다. 고마운 마음에 눈짓하자 별 거 아니라는 듯 지어보인 미소가 돌아왔다. 평범한 차도 아니고, 흔히 볼 수도 없는 경운기를 고칠 수 있는 청년. 언제든 고장난 기계덩어리를 고칠 수 있는 도구를 가진 청년.

 

 

"혹시 그분들은 여기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 아시나요?“

 

"뭐라고 했더라, 분명... 아, 그래!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그러더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두 친구의 모습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금 질문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자신의 예상과 이리 딱 떨어질 줄은 몰랐다. 어르신의 답변에 다른 두 사람도 무언가 깨달은 기색인 걸 보면 자신의 머릿속에 계속 떠다니던 가설이 기정 사실이 됐다고 봐도 무관했다.

 

 

"어라, 후루야 쨩 아니야?"

 

"뭐야, 왜 너희들이 여기있어?"

 

 

역시.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하기와라와 마츠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있었다. 품이 넓은 반팔 셔츠에 반바지,헐렁한 민소매에 긴바지를 입고 야무지게 샌들까지 신은 게 누가봐도 어르신께서 언급한 외부에서 놀러온 청년들이었다.

 

 

"아, 마츠다, 하기와라."

 

"일하고 있던 거 아니었냐고, 땡땡이냐?"

 

"아니야, 순찰 중이었는데 못보던 차가 있길래 좀 물어본 것 뿐이야."

 

"응? 청년들 아는 사이인가?"

 

"네, 친구에요.“

 

 

뭐야, 그랬구먼. 손자들의 친구들을 대하듯 부드럽게 미소짓는 어르신께 감사 인사와 안부 인사를 전하며 가볍게 허리를 숙여 배웅한 세 명은 이내 슈퍼라도 다녀온 듯 양 손 가득 커다란 봉지를 들고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지 물으니 예상했던 대로 우연히 휴가를 받게 되어-마츠다는 에이스로서 공을 세워라곤 했지만-뭘 할까 고민하던 중 관광 겸 힐링 겸 친구 셋이 일하는 마을에 놀러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간부터 차가 다니지 않아 지도를 보며 힘겹게 찾아가던 중 곤란해하던 촌장님네를 만나 경운기를 고쳐주고 보답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나 뭐라나. 고생이 많았다며 격려하는 히로미츠를 뒤로 하고 후루야와 다테는 가늘게 뜬 눈으로 두 사람이 들고 있는 짐을 바라봤다.

 

 

"그런 것 치곤..."

 

"짐이 많은데."

 

"아아, 내기에서 졌거든. 촌장님 강하시더라."

 

"젠장,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었는데!"

 

 

 

"오, 왔구먼, 왔구먼!"

 

"왔으면 어여 들어와, 한 판 더 해야지! 젊은 친구들이 늙은이한테 밀리면 쓰나!"

 

"지금 가요!"

 

 

억울함에 분통을 터뜨리는 마츠다를 놀리듯 문 밖으로 몸을 빼꼼 내민 촌장님과 감나무 댁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들의 도발에 욱한 건지 크게 소리치며 성큼성큼 촌장님 댁으로 앞서가는 마츠다의 뒤를 웃으며 따라 들어가는 하기가 한 쪽 눈을 찡긋이며 입모양으로 '보다시피 진페이 쨩이 저 상태니까 일 끝나면 이쪽으로 와' 라고 전하자 미소를 띈 세 청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빠지지 않고 순찰 중이던 자신들에게도 인사를 건넨 어르신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세 사람은 남은 순찰을 마무리하기 위해, 빨리 일을 마치고 먼 곳에서 찾아와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에 걸음을 서둘렀다. 시간이 흘러 이미 더위는 식어가고 있었고 뜻밖의 방문에 들뜬 마음은 남은 근무시간을 순식간에 해치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촌장님 댁으로 가면 내기에 진 마츠다를 놀려야지. 어르신들 성격이라면 분명 좋은 날이라며 술을 꺼내들고 오실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시고 놀면 일어나서 숙취로 고생 좀 하겠는데.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피곤한 몸을 어찌저찌 이끌어 해장을 하고 나면 히로와 함께 놀았던 고목 아래에서 그동안 못한 이야기도 나눠야지. 앞으로 있을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질 때마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분명 즐거울 것이라, 그리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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